고담의 뒷골목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도시의 포식자인 갱단과 잡범들에게도 질서라는 게 있었지만 판초 같은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복면 괴한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고담시의 밤하늘에 박쥐 시그널이 뜨면 누군가는 꼭 철창 신세를 지게 되는데 아직 경찰은 배트맨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려 한다.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안타까운 사고로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범죄자들을 멋대로 처단하고 다닌 지 2년째 되던 어느 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담의 거대 범죄 조직 우두머리인 카마인 팔코네(존 터투로)는 부패한 정재계 인사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며 그의 하수인인 오스왈드 코블팟, 일명 ‘펭귄’(콜린 패럴)이 운영하는 아이스버그 라운지는 범죄의 온상이다. 오늘 밤도 때려눕혀야 할 범죄자들이 그득한 상황에서 어떤 미치광이 살인마가 나타나 배트맨 앞에 도전장을 내민다.
계속되는 의문의 살인 사건 현장마다 배트맨 앞으로 온 수수께끼가 담긴 편지가 발견되자, 고든 경위(제프리 라이트)는 배트맨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선다. 여기까지가 개봉 전에 공개할 수 있는 <더 배트맨>의 간단한 배경 설명이다. 익히 잘 아는 배트맨의 활약상 가운데서도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초창기 시절을 다룬다는 걸 알 수 있다. 배트맨 탄생 50주년을 기념하며 기획된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에서 시작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른바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를 거쳐, 이제는 고담을 넘어 우주의 위기에 맞서던 벤 애플렉 버전의 배트맨까지 보고야 만 지금 시점에서 1인 자경대 서사를 또다시 반복해야 했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맷 리브스 감독의 연출 의도를 넘겨 짚어볼 첫 번째 단서는 <더 배트맨>의 시대 배경, 즉 배트맨이 망토를 두르기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시기라는 것이다.
젊은 배트맨
잘 알려졌다시피 이번 영화는 애초 벤 애플렉이 DC 확장 유니버스(DCEU)의 배트맨 역으로 캐스팅되면서부터 기획이 시작됐지만 출연은 물론 연출까지 도맡으려 했던 벤 애플렉이 감독직에서 하차하고,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표방하는 독특한 재난영화 <클로버필드>와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연출한 맷 리브스 감독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벤 애플렉 감독이 애초 추구했던 연출 방향은 액션 요원 중심의 제임스 본드 서사였다. 맷 리브스 감독은 젊은 배트맨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아직 준비가 덜된 것 같은 어떤 상태. “더 나아지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이는 젊은 배트맨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던 그에게 2년째 되던 시기는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던 모습을 보여주기 적절했다. 이번 영화에 영향을 끼친 원작 코믹스에 대해서도 뒤이어 소개하겠지만 2년차 배트맨을 다룬다는 것은 배트맨 팬들에게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배트맨 코믹스 역사를 뒤흔든 작가 프랭크 밀러의 걸작 <배트맨: 이어 원>(이하 <이어 원>)에서 바로 이어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맷 리브스 감독이 말한 ‘젊은 배트맨’의 매력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점이다. 그 스스로 이중적인 정체성을 고민하던 ‘비긴즈’ 시절은 다른 영화에서도 이미 묘사된 바 있지만, <더 배트맨>이 주목하는 시기의 배트맨은 좀더 거칠고 날이 서 있다. 어둠이 깔리면 모든 걸 스스로 판단하고 처단하며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까지 알아서 해야 하는 자경단원으로서의 혼란스럽고 피곤한 상황을 공들여 묘사한다. 예고편에서도 이미 공개된, 총탄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내가 바로 복수다”라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배트맨의 모습이야말로 <더 배트맨>이 강조하는 캐릭터의 특징이다.
탐정 배트맨
1939년, 작가 밥 케인과 빌 핑거의 손에서 처음 탄생한 배트맨은 그의 활약상과 연관된, 캐릭터의 특징에 부합하는 많은 별명을 얻었다. ‘망토를 두른 십자군’, ‘어둠의 기사’ 등으로 불리며 캐릭터의 진화를 거쳐온 그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의 본질이 ‘탐정’이라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고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재벌 2세라는 겉모습 뒤에 감춰진 브루스 웨인의 분노, “평생을 바쳐 범죄자와 싸우겠습니다. 부모님을 위해 복수하겠다고, 부모님의 영혼에 걸고 맹세할게요”(<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 등장한 배트맨의 대사)라고 외치던 어린 소년의 복수심이 박쥐 형상을 한 가면을 만들어내고 슈트를 만들어 입게 한 힘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 감정을 쏟아낼 방식도 필요한 법.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배트맨 캐릭터의 특징 중에는 복수의 감정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그가 탐정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묘사해왔다. ‘진짜 범인’을 가려내는 모습이야말로 배트맨의 본질이라 여겨졌다. 방탄 슈트는 다른 어떤 배트맨 슈트 못지않게 단단하게 묘사되지만 슈트 바깥의 브루스 웨인은 당장 쓰러질 것처럼 불안하다. <더 배트맨>에서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바꿔 말하면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브루스 웨인의 불안한 내면을 흐트러진 그의 눈빛을 통해서도 강조한다.
난데없이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더 배트맨>에서 탐정 배트맨이 제대로 추리하려면 또 무엇이 필요할까. 가상의 범죄 도시 고담을 묘사함에 있어 극사실적인 현실 기반의 세계를 창조하려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강조했던 점이다. 바로, 배트맨 혼자 범죄자를 처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배트맨은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 세운다. 고든 경위나 하비 덴트 같은 검사와의 합동 전이야말로 <더 배트맨>이 강조하려는 설정이다. 아직 경찰은 배트맨에 관해 입장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고든 경위만 그에게 우호적일 뿐이다. <더 배트맨>에서 연쇄 살인마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긴장감의 절반은 바로 이런 배트맨의 위험한 상황에서 온다. 배트맨은 언제든지 공권력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질문을 던지는 자
고담시를 대혼란의 장으로 몰아넣는 연쇄 살인마의 등장은 배트맨 탄생의 기원을 과감하게 삭제한 맷 리브스 감독에게 배트맨의 불안한 정체성을 공고히 해줄 훌륭한 장치로 활용된다. 감독에 따르면, “배트맨이 상대하는 리들러를 사회의 엘리트층을 목표로 하는 연쇄 살인마로 새롭게 해석하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리들러가 각종 범죄 현장에서 쏟아내는 암호와 질문이 향하는 곳은 결국 배트맨의 개인사와 관련된 것이라는 설계를 통해 “통제력을 상실한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폴 다노가 연기하는 리들러는 조디악 킬러 같다. 영화 잡지 <토털 필름>과의 인터뷰에서 맷 리브스 감독은 리들러에 관해 고민할 때 마침 “<마인드헌터>를 읽었고 코스튬의 근원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슈퍼히어로가 입고 선행을 베풀면 우리가 익히 아는 ‘슈트’가 되지만 연쇄 살인마가 자신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코스튬은 그 자체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결국 리들러의 가면과 복장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답변을 내놓는가가 아니라 왜 질문하느냐가 중요하다.” <배트맨 포에버>에서 고담 시민의 뇌를 흡수해 가장 똑똑한 천재 악당이 되겠다는 리들러 역을 연기한 배우 짐 캐리가 영화 홍보 인터뷰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소개하며 한 말이다. 수신자 배트맨 앞으로 수수께끼를 하나씩 내놓으면서 관련 범죄를 저지르던 범죄자 리들러의 입장에서는 배트맨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어떻게 답을 찾게 되는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 <더 배트맨>을 보는 관객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고담시를 대혼돈 속으로 몰아넣는 리들러의 심리적 근간에는 어떤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까. 리들러는 도대체 왜 배트맨에게 “이제 더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며 진실을 묻는 수수께끼를 냈을까. 그 대답을 관객이 얼마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이번 영화, 혹은 앞으로 이어질 두편의 시리즈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 같다.
영원한 범죄 도시, 고담의 변천사
<배트맨>을 만들 당시 팀 버튼 감독은 영화의 배경인 가상의 도시 고담을 “미국 도시의 불변의 상징인 뉴욕의 캐리커처”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덕션 디자이너 안톤 푸르스트와 함께 뉴욕과 시카고의 마천루에 가우디의 건축 양식을 접목시키고 교도소와 파시스트 건축물의 외관을 차용해 고담시를 디자인했다. 여기에 더해 <배트맨2>에서는 1920년대의 서유럽 건축물과 독일 표현주의 양식을 섞어 파시즘이 느껴지도록 설계했다. 조엘 슈매커 감독은 1930년대의 뉴욕 풍경에 1980년대 도쿄의 네온사인을 뒤섞어 정체불명의 도시 풍경을 만들어냈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고담시가 공업 도시가 아니라 상업 도시로서의 면모를 띠기 원했다. 대표적으로 <다크 나이트>의 시카고풍 고담시를 떠올리면 된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로 알려진 시카고의 윌리스 타워 꼭대기에서 고담시를 내려다보는 배트맨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이후 DCEU 세계관에서의 고담은 인접한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뉴욕과 시카고의 이미지를 모두 가진 도시 정도로 묘사되곤 했다.
<더 배트맨>의 맷 리브스 감독은 그레그 프레이저 촬영감독과 제임스 친룬드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함께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배트맨 월드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도시 풍경의 주된 레퍼런스는 1970년대 영화들의 뉴욕 풍경이었다. 범죄가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디트로이트나 클리블랜드의 도시 뒷골목도 차용했는데 제작진이 원했던 방향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보고 있으면 고담시만의 실패가 묻어나는 것이었다.
영화의 주요 공간으로 웨인 타워뿐만 아니라 셀리나 카일(조이 크래비츠)이 사는 아파트도 등장하는데 고담시의 홍등가에 위치한 ‘디 이스트 엔드’(The East End)라는 낡은 아파트다. <더 배트맨>이 주요 참고 텍스트로 활용한 코믹스 <이어 원>에도 등장하는 곳으로, 친룬드에 따르면 “왕가위 감독 영화의 질감과 패턴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