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더 배트맨'의 새로운 배트맨은 왜 로버트 패틴슨이어야 했나
2022-03-04
글 : 조현나
록 스타와 은둔자 사이 그 어디쯤

배트맨 가면이 벤 애플렉의 손을 떠났다. 새로운 주인으로 여러 배우가 거론됐으나 최종적으로 가면을 손에 쥔 이는 로버트 패틴슨이었다. 시리즈물의 배역이 바뀔 때마다 기대와 물음표는 함께 따라붙기 마련. DC의 인기 히어로 배트맨의 계보를 이어받은 로버트 패틴슨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 ‘로버트 패틴슨’인가. 마이클 키턴과 발 킬머, 조지 클루니, 크리스찬 베일, 벤 애플렉 같은 역대 배트맨과 견주어볼 때 로버트 패틴슨은 183cm의 큰 키에도 근육질이거나 다부진 인상을 주는 배우는 아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고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의 블록버스터 <테넷>에도 출연했지만, 그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주로 독립예술영화에서였다. 가령 <하이 라이프>에서 보여준 느린 호흡과 나른하고 피로한 인상, <굿타임>에서 <라이트 하우스>로 이어지는 긴장감, 신경질적인 광기 같은 것들이 그의 인장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배트맨이 로버트 패틴슨이어야 했을까. 맷 리브스 감독은 <더 배트맨>의 메가폰을 잡은 뒤 “이번 영화는 기존 DC 유니버스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노선을 갈 것”이라고 예고했다. 선대 배트맨과 결이 다른 로버트 패틴슨을 작품의 화자로 삼은 것 또한, 배트맨의 서사를 완전히 다른 층위에 두고 논하겠다는 감독의 선포와 다름없었다.

<굿타임>의 코니와 브루스 웨인의 교집합

<더 배트맨>은 히어로로서 활동한 지 2년 정도 된 젊은 브루스 웨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로버트 패틴슨의 말대로 <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은 “아직 자기 통제나 시설, 장비를 컨트롤하는 것에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앞선 배트맨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빌런 리들러(폴 다노)가 남긴 수수께끼를 해석하며 사건을 파헤치는 탐정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는 배트맨의 창시자인 밥 케인과 빌 핑거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것으로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와는 다르게 사건에 접근하는, 배트맨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욱 강조된 설정이다. 장르물을 연출할 때 인물 개인의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맷 리브스 감독의 특성은 이번 작품에서도 발휘됐다. 맷 리브스 감독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약하는 원동력인, 부모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더 배트맨>의 주요한 열쇠로 삼았고 “로버트 패틴슨의 전작을 보며 그에게서 배트맨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라고 전한다.

<해리 포터> <코스모폴리스> <라이프> <더 킹: 헨리 5세>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굵직한 작품만 훑어도 로버트 패틴슨의 필모그래피는 카테고리화하기 어렵다. 독립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넘나들며 자신을 폭넓게 변주해온 탓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배역과 장르에 관계없이 자신을 완벽히 바꿀 수 있음을 수년간 입증해왔다는 의미다. 맷 리브스 감독은 <잃어버린 도시 Z>에서 이러한 로버트 패틴슨의 장기를 처음 발견했다. 긴 턱수염에 예리하게 안경을 쓸어 올리는 모험가 헨리 코스틴을 보며 그가 패틴슨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카멜레온” 같은 배우임을 깨달은 데 이어 맷 리브스 감독은 <굿타임>을 통해 강렬한 영감을 얻는다. 극중 코니(로버트 패틴슨)는 자신의 동생과 은행털이를 시도하고, 도망치던 중에 동생만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후드티로 얼굴을 가린 채로 코 니는 동생을 빼낼 방법을 찾아 영화의 마지막까지 뉴욕 거리를 질주한다. 선공개된 <더 배트맨>의 예고편에서도 배트맨 특유의 아이라인을 그리고 후드 티를 뒤집어쓴 채 고담 거리를 활보하는 브루스 웨인이 등장한다. <굿타임>을 추동한 로버트 패틴슨의 에너지가 <더 배트맨>으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교집합이 존재한다. 경찰에 쫓기는 불안과 동생과 함께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코니를 더욱 폭주하게 만든다. 이는 자신의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배트맨 활동에 주력할 원료로 삼는 브루스 웨인의 상황과 일면 유사하다. 맷 리브스 감독은 그런 코니의 “절박함과 취약함”을 눈여겨보았고, 이어 로버트 패틴슨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로버트 패틴슨은 “맷 리브스 감독의 대본을 읽으면서 절박감이라는 감정을 느꼈고, 그것이 이전의 배트맨과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슈퍼히어로영화를 찍는 데는 관심이 없었지만 배트맨은 특별한 존재”였다는 로버트 패틴슨은 맷 리브스 감독이 배트맨의 트라우마와 양면성에 관해 설명한 것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확장시켜나갔다.

냉혹하지만 인간적인 배트맨의 탄생

<더 배트맨>의 예고편에는 밴드 너바나의 <Something in the Way>가 삽입되어 있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들은 맷 리브스 감독은 브루스 웨인과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연결지었고, 브루스 웨인을 “커트 코베인과 기업가 하워드 휴스의 중간 즈음에 있는 은둔자이면서도 로큰롤 감성이 있는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웨인가의 일원임을 포기한 그는 일종의 록 스타와 같은데, 밤에 나가서 공연하는 대신 배트맨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마치 록 스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무대를 휘어잡듯 말이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 냉혹하고 때로 광기에 사로잡히는 히어로와 검은 가면 아래 감정을 숨긴 한 인간의 얼굴을 동시에 그려내기에 로버트 패틴슨은 더없이 적절한 배우였다. 그는 <굿타임>을 포함한 자신의 전작들로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 <굿타임>은 로버트 패틴슨의 메일에서 시작됐다. 사프디 형제의 전작 <헤븐 노우즈 왓>의 배너에 반한 그가 두 감독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렇게 사프디 형제가 로버트 패틴슨을 염두에 두고 <굿타임>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 것이다. 그 <굿타임>으로 인해 맷 리브스 감독이 로버트 패틴슨을 차기 배트맨으로 낙점하고, 그를 떠올리며 시나리오를 썼다는 일련의 과정은 꽤나 흥미롭다. 창작자들은 로버트 패틴슨의 어떤 면에 매료되는 것일까.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얼굴을 드러내길 바라는 것일까. 그 질문의 답은 <더 배트맨>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고담의 하늘을 밝히는 배트 시그널과 함께, 로버트 패틴슨은 전에 없던 자신만의 몸짓과 걸음걸이, 그리고 목소리로 관객에게 대화를 건넨다. “나는 복수다”(I’m vengeance)라고, 배트맨의 상징적인 대사를 힘주어 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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