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 없는 영웅은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에서 조커가 배트맨에게 했던 “유 컴플리트 미”(You complete me)라는 말은 거꾸로도 성립한다. 슈퍼히어로영화의 영웅은 악당이 있음으로써 완성되며, 그 존재가 정당화된다.
배트맨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는 이런 악당 묘사가 무척 까다롭다. 배트맨이 전혀 ‘슈퍼’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코믹스의 배트맨은 인간의 한계에 걸쳐 있는 육체와 정신력, 지능을 지녔지만(거기에 슈퍼울트라얼티밋 재력까지) 이를 스크린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영화에서 현실성을 찾는다는 게 우습게 들리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배트맨에게는 현실성이라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과거에는 화학약품에 빠져 기괴한 얼굴과 광기를 얻었다는 설정의 악당이 등장했던 팀 버튼의 <배트맨>(1989), 손모아장갑을 낀 듯 손가락이 뭉쳐 있는, 검은 피를 흘리며 날생선을 즐겨 먹는 악당이 나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배트맨2>(1992) 같은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배트맨은 ‘슈퍼’히어로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로 손꼽히는 크립톤인 슈퍼맨과 누구보다 터프한 7대양의 지배자 아쿠아맨, 각종 마법 장비로 무장한 아마조네스 원더우먼, 눈 깜박하는 사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 수 있는 진짜 천재 플래시, 사이버스페이스 그 자체인 반인 반기계 사이보그 사이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 존재가 된 듯하다. <저스티스 리그>에서 플래시가 “아저씨는 슈퍼파워가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배트맨이 “돈”이라고 대답한 이유는 실제로 그의 슈퍼파워가 돈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를 보며 피식 웃고 밈으로 꾸며 온라인에 뿌렸지만, 브루스 웨인이라면 웃어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배트맨의 한계를 규정하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2022년은 <배트맨 앤 로빈>(1997) 때처럼 매력적인 팜므파탈 포이즌 아이비가 나무뿌리로 배트맨을 감싸고 얼굴에 독을 살포하면 뭔가 어색한 시대가 되었다.
넘기 어렵지만 피할 수도 없는 빌런 만들기라는 과업
이 문제는 <더 배트맨>에서 상당한 난제였을 것 같다. 이미 ‘놀란 3부작’으로 눈이 저 우주 끝까지 높아진 관객을 설득하는 동시에, ‘슈퍼’하지는 않지만 그에 준하는 위압감과 존재감, 당위성을 지닌 악당을 선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놀란 감독 역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의 베인을 통해 실패한 과업이다. 넘기 어렵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더 배트맨>은 팔코네, 펭귄 그리고 리들러라는 인물을 선택했다.
<더 배트맨>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마피아 보스, 카마인 팔코네는 <배트맨> 코믹스 중에서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배트맨: 이어 원>(1988, 이하 <이어 원>)과 <배트맨: 더 롱 핼러윈>(1996, 이하 <더 롱 핼러윈>)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로, 놀란 3부작의 첫 작품인 <배트맨 비긴즈>(2005)에도 얼굴을 내비친 적 있는 캐릭터다. 인간에 불과한 캐릭터가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오랜 기간 악역으로 살아남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비토 콜레오네가 슈퍼히어로영화에 나온다고 상상해보자) 팔코네가 가진 캐릭터성과 생명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런 점은 <더 배트맨>이 가장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두편의 코믹스 원작 <이어 원>과 <더 롱 핼러윈>에 잘 나타나 있다. 코믹스에서의 팔코네는 누군가의 살해를 사주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장미꽃 향기를 맡고, 혈육인 아들의 올바른 성공을 바라는, 영화 속 이탈리아 마피아의 전형이다. 영화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또 한명의 마피아 보스 살바토레 마로니와는 라이벌 관계로, 코믹스에서는 호시탐탐 고담시 암흑가 황제 자리를 두고 견제하는 사이로 나오곤 한다.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고담에서 수십년간 밤거리를 지배하며 정재계는 물론 언론까지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며 인간계의 정점에 서온 팔코네 역에 존 터투로를 캐스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카마인 팔코네는 고담의 뒷골목 질서를 정의하는 자이기에, 마찬가지로 밤의 지배자 자리를 노리는 배트맨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고담 밤문화의 상징인 아이스버그 라운지 사장이자 카마인 팔코네의 오른팔로 등장하는 오스왈드 코블팟, 일명 펭귄은 팔코네와 달리 실사화가 무척 까다로운 인물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배트맨2>에서 온갖 기믹이 장착된 우산을 지니고 다니는 대니 드비토가 연기한 캐릭터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이 펭귄이 아닌 ‘펭귄맨’이라고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환상적인 터치를 통해 코믹스와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린 팀 버튼의 ‘배트맨 월드’에서나 등장 가능한, 고귀한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의 대척점에 위치한 밤문화의 대부 펭귄을 2022년 배트맨의 실사판에서 악역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제작진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배트맨>의 펭귄은 육체적으로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코믹스상에서 등장했던 펭귄과 유사점이 많다. 말하자면 팀 버튼 영화 속 펭귄이 오히려 코믹스와 거리가 먼 묘사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 배트맨>의 펭귄은 손모아장갑을 낀 듯 손가락이 뭉쳐 있지도 않고 검은 피를 흘리며 날생선을 즐겨 먹지도 않지만 관객의 마음에 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펭귄의 첫 등장 신을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일반적인 영화의 법칙과는 다른,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듯한 편집상의 특이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자원이 한정된 동물원에서 강자들 사이에 서열 다툼이 끊이지 않듯, 고담시 암흑가의 이인자 역시 호시탐탐 일인자 자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악당인 오스왈드 코블팟, 즉 펭귄이 어떤 계기로 배트맨을 위협하는 마피아 보스의 자리까지 오르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앞으로 이어질 새 시리즈의 포인트가 될 것이다.
폴 다노가 연기하는 리들러의 존재감
알려졌다시피 <더 배트맨>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자랑하는 악당은 폴 다노가 연기하는 리들러다. 각종 수수께끼와 말장난, 언뜻 놓치고 지나가기 쉬운 라임으로 무장한 리들러는 배트맨뿐만 아니라 영화 대본을 번역해야 하는 전세계 번역가들마저 위협하며 제4의 벽에 균열을 일으키는, 그야말로 최악의 악당이다. 리들러가 쏟아내는 수수께끼를 각국의 언어로 온전하게 번역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또한 리들러는 전통적으로 코믹스상에서 다소 깡마른 체형에 신경질적이며 예측 불가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 적이 많다(최근 몇년 사이 출간된 코믹스에서는 좀 달라지긴 했다). 따라서 조엘 슈매커의 <배트맨 포에버>(1995)에서 묘사된, 리들러라고 쓰고 짐 캐리라고 읽는 녹색 쫄쫄이 미치광이 캐릭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허름한 작업복 스타일에 위압적인 말투로 배트맨을 위협하고 고담시에 공포를 안기는 폴 다노 버전의 리들러에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코믹스상에서의 리들러 역시 총과 폭탄을 선호하며 무고한 이들을 해치는 테러리스트에 가깝지만, 미소를 지으며 라임 가득한 수수께끼를 쏟아내는 한편 손으로는 폭탄 격발 장치를 가동하는 그 모습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이는 설득의 문제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시 입만 열면 가벼운 말을 내뱉고 쉴 새 없이 입술을 핥는 등 경박한 행동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이 영화 사상 최악(즉, 최고)의 악당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 배트맨>의 리들러는 어떨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힌트를 주자면, 이번 영화는 이 난제를 상당히 영리한 방법으로 돌파한다. 알려진 대로 <더 배트맨>은 배트맨으로 활약한 지 2년째인 상황을 다룬다. 이 정도면 배트맨의 기원에 관해 반복 설명할 필요가 없는 동시에 얼마든지 새로운 배트맨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절묘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악당 팔코네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가 미완성의 캐릭터다. 배트맨은 아직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지 못했고, 캣우먼은 스스로를 캣우먼이라 부르지 않으며, 펭귄은 건달에서 마피아로 신분 상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리들러 역시 악당으로서 그의 행보를 세상에 알리는 첫 수수께끼를 이제 막 던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그 어떤 선입견 없이 영화가 이끄는 대로 각각의 빌런 캐릭터들이 진화하는 과정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맷 리브스 감독이 앞으로 그려나갈 고담의 세계에서 배트맨뿐 아니라 개성 넘치는 악당들이 또 어떻게 등장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기반의 가상 세계 안에서 ‘슈퍼’하지 않은 영웅과 악당을 ‘슈퍼’하게 그려야 하는 점, 그것은 <더 배트맨>에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더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라는 거대한 바위에 깔린 채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만 하는 맷 리브스 감독이 내놓은, 거칠고 강렬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똑똑한 모범답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