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DC 편집국은 작가 밥 케인과 빌 핑거가 1939년에 만들어낸 배트맨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디자인할 계획을 세운다. 이 과업을 맡게 된 작가는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한 노년의 브루스 웨인을 가지고 걸작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2018, 시공사 펴냄)를 완성한 프랭크 밀러였다. 그는 배트맨의 시작점을 다루는 <배트맨: 이어 원>(2018, 시공사 펴냄)의 스토리를 썼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범죄 사냥꾼이 될 것이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대부분의 배트맨 주연 영화가 참고한, 교과서 같은 텍스트였다. 배트맨이 스스로 자경단원 행세를 하면서 범죄자를 무찌르기 시작한 첫해의 이야기다. 경찰도 배트맨을 적으로 생각하고 추적하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고든 경위만 배트맨의 진심을 알아준다. 캣우먼 셀리나 카일 역시 배트맨처럼 범죄자들의 뒤를 캐고 다니기 시작한다는 묘사 역시 <더 배트맨>의 캣우먼 설정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더 배트맨>이 직접적으로 오마주하듯 이야기를 가져온 작품은 또 있다. 할리우드에서 각본가로도 활약하던 제프 로브가 쓰고 팀 세일이 1996년에 그린 <배트맨: 롱 할로윈 디럭스 에디션>(2022, 시공사 출간 예정, 이하 <롱 할로윈>)은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누아르 장르를 처음으로 배트맨 서사에 접목해 만든 작품이다. 팔코네와 마로니로 대표되는 고담의 거대 범죄 조직 우두머리의 이권 다툼 속에서 검찰과 경찰, 정재계 인사들이 모두 부패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 범죄 조직이 지배하는 고담시의 밤거리는 ‘홀리데이’라는 닉네임의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면서 대혼란에 빠진다. 배트맨은 살인마를 추적하는 한편, 그의 천적과도 같은 수많은 악당들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배트맨이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썩어빠진 고담시의 붕괴된 시스템이 서서히 드러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를 만들면서 <롱 할로윈>이 처음으로 묘사한 검찰, 경찰, 탐정의 합동 수사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크리스찬 베일은 <배트맨 비긴즈> 촬영 때 몰입을 위해 <롱 할로윈>을 대본과 함께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 공공연히 말해왔고, <다크 나이트>의 시나리오작가 데이비드 S. 고이어는 이 작품이 프리츠 랑의 <M>을 연상시킨다고도 했다.
이제 막 범죄자를 처단하기 시작한 배트맨의 도덕적 고뇌는 작가 다윈 쿡이 쓰고 그린 <배트맨: 에고>(2022, 시공사 출간 예정)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은, 세상은 고사하고 고담시조차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배트맨의 고뇌와 함께 시작하는 <배트맨: 에고>는 브루스 웨인이 거대한 ‘공포’라는 이름의 초자아와 갈등하는 이야기다. 수많은 감독들이 배트맨의 이중적인 면모, 그가 지닌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묘사해왔다.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슈퍼히어로를 표방하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다른 히어로들과는 다른 종류의 고민과 감정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