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타임머신을 타고 어딘가로 여행하듯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바뀌진 않는다. 비유하자면 현재는 미래의 씨앗을 심어둔 드넓은 농토다. 어떤 씨앗은 수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 하면 어떤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나 땅을 뒤덮는다. 반면 어떤 씨앗은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얼음왕 프레더릭 튜더의 항만 냉동창고 아이디어가 19세기 냉장 기술을 만나 가정용 냉장고로 이어지기까지 50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50년대 와이드스크린과 시네마스코프는 불과 5년이 채 되지 않는 단시간에 영화의 패러다임 전체를 바꿨다. 때로 변화는 느리게 다가오는 듯하지만 임계점을 지나면 폭발적인 에너지로 세상을 한번에 물들이기도 한다.
극장과 비디오의 갈림길에서
미디어 분야, 정확히는 미디어 스토리텔링 콘텐츠에서 근 10년 사이 가장 주목받는 기술은 단연 XR이다. VR, AR, MR 등 다양한 몰입형 기술을 포괄하는 XR은 올드 미디어로 밀려 하락세를 겪고 있는 영화산업의 탈출구가 될 것처럼 보였다. 스크린은 생명 연장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갈구한다. 영화의 역사는 기술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플랫폼 형식이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4:3 화면비에서 16:9로, 2D에서 3D로 스크린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 진화를 거듭했다. 하지만 3D가 완벽히 안착하여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했듯 현재 XR도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꽤 오랜 기간 유망주 혹은 차세대 기술의 영역을 맴돌던 XR 분야에 변화의 징후가 감지됐다.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혁신적인 킬러 콘텐츠가 등장한 건 아니다. 다시금 모이는 기대감의 중심에는 결국 출구 플랫폼의 변화가 있다. 최근 애플의 새로운 MR 디바이스 애플 비전 프로가 출시를 예고하며 광폭 행보를 걷고 있다. 다소 거칠게 축약하면 소비자들이 직접 만날 출구 플랫폼이 부족하다는 게 XR이 계속 가능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장벽과 한계였다. 거대한 광풍처럼 몰아닥쳤다가 금세 식어버린 메타버스 열풍과 마찬가지로 너무 빨리 그린 미래의 청사진으로 인해 피로감이 쌓였던 게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이폰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애플이 플랫폼 기반의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하여 또 다른 시장이 형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스토리 기반 XR 콘텐츠 제작사 ‘기어이’의 이혜원 대표는 애플의 비전 프로가 “게임 체인저가 되어주길 바란다. 완전 집중을 요구하는 메타의 오큘러스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인데, 가볍고 접근하기 쉬운 짧은 콘텐츠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엄밀히 말해 비전 프로의 등장이 정체된 XR 시장에 탈출구가 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XR의 출구 플랫폼의 문제는 아직 표준화된 시장 지배적 기준 없이 각 기업이 서로의 기술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메타의 ‘오큘러스’가 VR을 전제로 한 완전한 몰입형 디바이스라면 애플의 비전 프로는 공간 컴퓨팅에 주안을 둔 MR 형식의 헤드셋에 가깝다. 과거 비디오 시장에서 베타와 VHS 방식의 경쟁 끝에 하나가 살아남았듯이 대중적 확산을 위해선 표준이 될 기준이 필요하다. 이건 기술의 완성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포맷이 시장을 지배하는가의 문제다. 하지만 애플이 촉발한 변화의 징조는 적어도 콘텐츠 산업이 XR에 품고 있는 막연한 환상과 오해를 벗겨줄 좋은 기회처럼 보인다. 이를 위해선 우선 범주를 좁히고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건 XR 전반에 대한 기술적 분석이 아니다. 영화산업을 중심에 놓고 봤을 때 지금은 스토리텔링 영상 콘텐츠, 더 좁게는 이머시브 콘텐츠(몰입을 중심으로 한 실감형 콘텐츠)를 중심으로 XR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영화기술의 입장에서 애초에 XR은 미래와 비전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거론된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전환점이 될 수 있는지는 광범위한 적용과 유의미한 산업의 전환, 즉 수익 모델의 가능성 여부에 달렸는데 지금까지의 현실을 놓고 보자면 실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전시와 특별전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 중이지만 패러다임을 바꾸기엔 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런 정체 국면은 꽤 오랜 기간 방치됐다.
전시와 문화공간에서 발견한 가능성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몇 가지 상황이 전환됐다. 정확히는 환상이 걷히고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스토리텔링 이머시브 콘텐츠를 기준으로 했을 때 XR 콘텐츠의 수익 모델은 비디오인가, 극장인가. 다시 말해 개인형 디바이스가 중심이 될 것인가, 극장과 같은 집단체험의 공간이 중심이 될 것인가.
코로나 이전에는 당연히 비디오형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 메타버스 시대에는 각자 자신의 집에서 체험형 콘텐츠를 즐기는 동시에 가상공간을 기술적으로 이어주는 형태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예고편처럼 미리 보았던 미래의 청사진과 달리, 메타버스의 거품이 꺼지는 현실을 목격하며 디바이스의 표준화와 생태계 구축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다.
이런 국면에서 XR이 먼저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 건 전시와 같은 극장형 체험의 콘텐츠들을 통해서다. 그동안 꾸준히 XR 콘텐츠를 만들어온 <소녀램프라디오>의 최민혁 감독은 “메타를 비롯한 온라인 플랫폼이 다소 위축되는 사이 베니스국제영화제, 선댄스영화제,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전시를 기반으로 하는 아티스트 비즈니스의 생태계가 구축 중”이라고 말했다. XR을 활용한 몰입형 스토리텔링과 라이브 퍼포먼스 분야에서 꾸준한 시도를 통해 미학적인 진보, 기술적 축적이 형성된 결과다.
현재 XR은 초기 영화의 본질에 다가가는 중이다. 그중 하나가 몰입을 전제로 한 전시의 고급 미술화다. 차이밍량 감독의 작품처럼 미술관으로 거점을 옮겨가는 영화들도 큰 맥락에서 보면 같은 흐름에 있다. <하류>를 차용한 <에로틱 스페이스>(2007)는 대만 고궁미술관의 지원으로 제작 전시되었고, 루브르와 협업한 <얼굴>(2009)은 이후 2점을 제작하여 뉴욕 현대미술관과 대만영화시청각연구소에 고가로 판매했다. 박리다매의 대중오락으로서의 위치가 희미해지는 대신 오리지널과 이에 따른 높은 가치를 매긴다 해도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소수의 고급 예술로 안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핵심은 공간을 중심으로 한 미학적 탐색이 유의미한 수익 구조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이혜원 대표는 “배급 경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제는 중요한 통로이자 시발점이다. 전시형 이머시브 콘텐츠가 제작되면 우선 4, 5개의 해외영화제에서 먼저 피칭을 하고 이후 미술관이나 전시 문화공간으로 확산된다. 이런 유통을 통해 작품의 로열티를 배분하는 구조도 점차 자리 잡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향후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언정 개인용 디바이스를 통한 시장도 점차 자리 잡아나갈 것이 자명하다. 그날이 올 때 스토리텔링 이머시브 콘텐츠로서 XR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가치를 증명해야 하고, 그 역할을 현재 전시 중심의 XR이 활발히 수행 중인 셈이다.
가장 비디오적인 매체가 될 것이라 짐작했던 XR이 오히려 전시를 중심으로 쓸모와 존재를 증명한다는 건 얼핏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 ‘영화라는 기술’이 탄생했을 때도 그러했다. 오히려 전시를 통한 집단 경험을 먼저 구축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순서를 밟아나간다는 느낌도 든다. 돌이켜보니 애초에 질문이 잘못됐다. XR을 전시와 대중화, 혹은 극장과 비디오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접근하는 고정관념이 함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회화와 전혀 다른 영역이었던 것처럼 XR 중심의 이머시브 콘텐츠는 영화와는 같은 듯 전혀 다른 상상력을 제공한다. 최민혁 감독은 자신의 아이들이 XR 디바이스를 처음 썼을 때 “이거 어떻게 봐야 해”가 아니라 “여기는 어디야?”라고 질문했던 것이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XR이 스크린의 연장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방식을 어떻게 확장할지를 고민하는 건 영화,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2D의 스크린 중심의 사고다. 하지만 XR은 스크린의 다른 형태라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공간의 창조에 가깝다.
새로운 공간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물론 새로운 언어 역시 무(無)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극장영화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두개의 기둥, 이야기의 전달과 몰입의 체험이 필요한 이유를 XR에서 만난다. 이야기와 몰입, 이 두 가지야말로 한계 없는 기술인 XR이 영상체험이라는 형태를 갖추기 위한 최소한의 구심점이자 영화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는 본질이다. 아직은 수많은 미래 중 한 가지에 불과하지만 드디어 실현 가능한 선명한 궤적 하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