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한 작가는 디지털 페인팅을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이어가는 창작자다. ‘2023 아트바젤 인 홍콩’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꾸준히 참여했고, 지난해엔 개인전 <Spawning Scenery>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구찌의 ‘2024 크루즈 패션쇼’에서 굿즈·패션 디자인을 맡거나 하이브·SM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들의 앨범 아트를 제작하는 등 디자인 업계 전반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의 질감이 선명히 느껴지는 쨍한 색감, 게임·만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서브컬처 특유의 그로테스크함과 키치를 특징으로 삼는다. 최근 람한 작가는 5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게임사회> 전시에서 신작 VR 작품 <튜토리얼: 내 쌍둥이를 언인스톨하는 방법>(이하 <튜토리얼>)을 발표했다. 기존에 보여주던 서브컬처의 정취를 작가 개인의 역사와 혼합한 <튜토리얼>은 국내 XR계의 새로운 시도로 떠오르고 있다.
- <튜토리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몇년 전에 기획한 이야기다. 쌍둥이 동생과 나눴던 대화로부터 시작됐다(<그 여름> 등을 만든 한지원 애니메이션 감독이 동생이다). 우리가 쌍둥이로서 겪었던 모종의 경쟁 심리와 애증, 갈등과 성장 과정을 성인이 된 지금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맥락이었다. 마침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임사회>전의 전시 목적으로 게임적 상상력을 기반한 VR 작품을 의뢰했고, VR 포맷이 묵혀뒀던 쌍둥이 이야기와 잘 어울리겠다고 느꼈다.
-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 애초부터 이 이야기는 게임 포맷의 튜토리얼까지 만드는 작업으로 고려했다. 요즘 게임들을 보면 튜토리얼에 게임의 세계관과 스타일의 정수가 다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대개 캐릭터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세계에 풍덩 떨어지며 시작하는데, 플레이어는 이 세계의 비밀을 능동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게임이 1부터 10까지의 서사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빌드업하는 흐름이 아니라 시청각적인 단서를 통해 플레이어가 서사의 조각을 직접 취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상황적, 감정적 동일시를 더 효과적으로 구현해낸다. 최근 해본 게임 중엔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이 그랬다. 그러니 <튜토리얼>의 주인공인 기억이 기억을 잃었다는 상황, 그리고 플레이어가 직접 이 기억의 기원을 좇아야 한다는 게임적 구성이 잘 들어맞겠다고 생각했다.
- 실제 쌍둥이로서 겪은 삶을 토대로 했지만, 작품에선 쌍둥이 니은을 실재하지 않는 존재로 그렸다.
= 쌍둥이지만 기억과 니은은 각자의 세계 속에 사는 엄연한 개인이고, 서로의 존재를 주관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즉 기억에게 니은은 살아 있든 아니든, 존재하든 아니든 언제나 모호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VR의 메커니즘도 마찬가지다. 헤드셋을 쓴 플레이어에게만 작품의 이미지가 주관적으로 형성된다. 니은에 대한 기억의 인식, 이것을 체험하는 VR 플레이어의 감각 역시 모두 지극히 개인화된 경험이다. 가령 작품 중엔 니은을 만지라는 상호작용이 지시된다. 그러나 기억과 플레이어는 니은을 제대로 감각하지 못한다. 이처럼 시나리오에 극한으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의 조성을 VR 기기의 특성과 결부하려 했다. 인간을 만진다거나, 부싯돌을 부딪친다거나, 자동차 운전을 하는 상호작용도 서사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선으로 조율했다.
- 개인전 <Spawning Scenery>에서 전시한 첫 번째 VR 작품
= VR 콘텐츠를 처음 접했을 때 VR 플레이어들이 무심코 허공에 손을 뻗는 경우를 많이 봤다.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이미지가 허상임을 알면서도 그 영상의 부피감이나 양감에 압도되는 것이다. 비단 작품의 이미지가 현실과 비슷한 고품질의 그래픽이 아닐지라도 마찬가지다. 로 폴리(Low Poly)의 3D나 비현실적 질감일지라도 ‘리얼하다’라는 감각을 느끼는 셈이다. 그래서
- <튜토리얼>도 로 폴리 계열의 그래픽 스타일을 택했다.
= <포켓몬스터> 게임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한다. 왜 사람들이 수백, 수천 마리의 포켓몬을 모으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면 매번 흥미롭다. 포켓몬 캐릭터가 현실의 질감, 모양과 다를지라도 수용자가 해당 콘텐츠의 미감과 세계관에 설득당하고 동화되는 것이지 않나. 이런 측면에서 <튜토리얼>의 로 폴리 스타일 역시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는 미감이 될 수 있겠다고 여겼다. 물론 VR 하드웨어인 HDM(Head Mounted Display)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 게임에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 어릴 때부터 게임을 아주 많이 했다. 요즘도 웬만한 신작 게임은 다 한번쯤 건드려본다. 어릴 때 꿈이 게임 컨셉 디자이너기도 했고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같은 서브컬처에서 늘 창작의 영감을 받기도 한다. 가령 <디아블로> 시리즈 같은 게임들은 캐릭터의 생명력을 빨간색 구체로 표현하지 않나. 내 이전 작품들을 보면 이런 게임적 설정에서 따온 이미지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넥슨사의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일랜시아>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 <튜토리얼>에서 니은의 디자인도 넥슨사의 MMO RPG게임 <마비노기>의 캐릭터 ‘모리안’ 같다.
= 맞다. (웃음) 둘 다 즐겨하던 게임이다. 모리안은 깃털 날개를 지닌 아주 아름다운 여신 캐릭터다. 그런데 게임을 자세히 보면 날개가 각져 있다거나, 자연스럽지 않은 로 폴리로 이미지가 구현돼 있다. 하지만 어릴 때 보면 모리안이나 <마비노기>의 다른 캐릭터들은 분명히 아름다웠고 예뻤다. 이런 경험이 기존 작업뿐 아니라 니은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의 역할도 플레이어에게만 보이는 영혼 혹은 데이터 글리치라는 니은의 설정에 영감을 줬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세계관 또한 작품 곳곳의 이미지를 구현할 때에 참조했다.
- 게임뿐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처 감성이 창작 스타일에 많이 녹아 있다.
= <튜토리얼> 전반의 미감에도 소위 말하는 일본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의 ‘중2병’ 감성이 녹아 있다. 이것들의 이미지적인 클리셰나 장르적인 관습을 노골적으로 넣으려 했다. <튜토리얼>이라는 제목도 일본 웹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느낌으로 지었다. 이런 외피들로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감성을 진하고 익숙하게 전달하되, 이야기 측면에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상념을 신선하게 풀어보고 싶었다. 축약하자면 관습적인 이미지와 탈관습적인 서사의 불협화음을 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 <튜토리얼> 작업을 마친 소감은.
= 작업 기간과 자원이 한정적이었던 만큼 완벽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자주 해보고 싶다. 이전에 작업하던 드로잉 작품들과 다른 결에서, 조금 더 시간적인 영역에 관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튜토리얼> 완성본을 처음으로 플레이했을 때 적잖이 흥분했다. 내가 만든 이야기, 이야기에 결합한 게임의 장치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 결과를 관객들이 수용한다 생각하니 말이다. 이렇게 내 세계관과 감정을 더 복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 디렉팅의 영역으로 작업을 확장할 수 있겠다는 비전이 떠오르면서 XR 작업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XR 콘텐츠의 미래를 어떻게 보나.
= HDM의 기술적 완성도와 편의성은 아직 프로토타입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적은 수일지라도 일부 창작자들이 끈끈히 네트워킹을 이어가고 있고, 애플 비전 프로 같은 기술의 진보도 가시화되고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튜토리얼>의 작업에도 아이폰의 AI 모션캡처 앱이나 미드저니(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를 애용했다. 이렇게 AI 기술이 급격히 상용화된 만큼 XR에서도 가파른 변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XR 콘텐츠의 핵심은 ‘어딘가에 내가 존재한다’라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쪽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튜토리얼: 내 쌍둥이를 언인스톨하는 방법>의 플레이어는 흡사 1인칭 콘솔 게임의 방식처럼 주인공 ‘기억’(Soma)의 시점에서 스토리를 따라가게 된다. 기억에겐 ‘니은’ (Amos)이라는 배니싱트윈(임신 초기의 모체에서 사라진 쌍둥이 중 하나)이 있다. 어느 날부터 니은의 환영이 자꾸만 기억에게 나타나자 기억은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치료의 방점은 기억의 시각 정보에 저장돼 있는 과거의 이미지를 탐험하는 데 있다. 이윽고 기억은 자신과 니은 사이에 얽힌 과거의 소실을 파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