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공간이 이야기가 되다, XR 콘텐츠를 말할 때 장소성이 중요한 이유
2023-07-21
글 : 김종민 (프로그래머)
김종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XR 큐레이터
<영원한 노트르담 성당> 플레이 화면

XR 콘텐츠는 공간에 서사를 심는 표현 양식이다. 이처럼 공간 서사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간’ 그 자체를 소재나 주제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XR 콘텐츠가 관객의 활동이 제한된 영화관이나 공연 무대에서 전시되기보다 관객의 상호작용이 용이한 미술관이나 특설 전시관 혹은 현실의 장소에서 유의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베니스국제영화제는 과거 한센병 환자를 격리했던 리도섬 근처의 작은 섬 하나를 ‘XR 아일랜드’로 만들어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대만의 가오슝영화제는 옛 항구를 재정비한 ‘보얼예술특구’의 피어2아트센터(Pier 2 Art Center)에서 XR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XR 콘텐츠의 중점은 ‘장소의 현실감’

<영원한 노트르담 성당>을 플레이하는 관객들

왜 공간인가? 3차원에 존재하는 인류는 당연히 3차원을 기반으로 한 소통이 가장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3차원을 3차원으로 재현하는 표현 방식은 다분한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제한돼왔다. 회화는 원근법을 통해 공간감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며, 3차원 공간을 2차원으로 변환해주는 탁월한 기기인 카메라를 활용한 사진이나 영상 역시 제한된 방식의 공간 표현만이 가능했다. 조각이나 건축은 대개 움직이지 않으며, 공연 예술 역시 프로시니엄과 무대장치를 통해 제한된 3차원 표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XR 디지털 기술은 3차원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수준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아가 다양한 장르와 형식, 매체간의 융합을 통해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XR의 3차원적 표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3차원의 성질을 지닌 실제 공간의 장소성이다. 2차원의 평면을 영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극장이 아니라 가령 수용자가 직접 걷고 몸을 움직이며 공간의 구석구석을 3차원으로 경험하기 위한 곳, 3차원의 특질이 잘 구현되는 곳의 개입이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건축가나 건축물에 대한 XR 작품들이 제작되고 또 큰 흥행을 거두고 있다. XR 콘텐츠가 구현해야 할 3차원의 특질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곳이 현실의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올해 부천영화제의 비욘드 리얼리티 부문 선정작 중 <가우디의 신성한 아뜰리에>가 큰 주목을 받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본작은 ‘공간 서사’라는 XR의 핵심을 건드리며 ‘다인체험’(Multi-user Experience)과 같은 최근 XR 콘텐츠의 경향을 충분히 반영한다. 여기에 높은 수준의 표현 기법과 연출 수준을 증명하며 ‘가우디의 실제 작업실을 현실처럼 체험한다’라는 XR 콘텐츠의 실효성을 입증했다. 이외에도 <르 코르뷔지에 사부아 주택 VR> <샹폴리옹, 이집트 이야기>와 같은 작품도 실제 건축물을 구현하는 XR 콘텐츠의 경향을 반영했다.

여기서 다인체험이란 작품을 함께 관람하고 있는 다른 관객의 존재를 볼 수 있도록 설계한 XR 콘텐츠의 방법론이다. 이는 관객에게 좀더 몰입감 있는 감상 경험을 유도한다. 관객이 경험하는 이야기 공간(Story world) 속에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다른 관객이 있으면, 그 시공간이 더욱 명확하게 ‘실재하는 시공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작품이 실사로 촬영되었는지, 아니면 그래픽으로 만들어졌는지보다 중요하다. 나 혼자 무언가를 ‘관람’한다는 느낌보다 누군가와 함께 ‘존재’한다는 느낌이 더 압도적인 현실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극장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관객의 존재감을 소거하고 영화와 마주하는 형식이라면, XR 콘텐츠의 다인체험은 외려 다른 관객의 존재를 더욱더 강조하는 모양새가 된다.

즉 XR 콘텐츠의 중점은 ‘장소의 현실감’이다. 예시로 이번 부천영화제에 전시된 <파인드 윌리 에피소드1. 불청객>을 언급할 수 있겠다. 세계 3대 XR 축제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영화제의 올해 XR 경쟁부문에도 초청된 바 있다. 본작은 투박한 3D 아바타로 가득 찬 VR챗 월드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형태의 작품이다. 그러나 관객과 배우가 실시간으로 상호 소통하는 형태이기에 상당한 수준의 몰입감과 서사적 경험을 제공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직접 상호작용하며 서사 내의 ‘역할’을 부여받은 XR의 관객과 스트리밍 상영을 통해 작품을 관람한 관객 사이에는 커다란 몰입감의 차이가 있었다. 이것 역시 고전적인 연극 무대 혹은 영상 포맷의 장소성이 XR 콘텐츠에 가지는 괴리감의 일부이다.

‘스토리 월드’에 대해 이야기할 때

<파인드 윌리 에피소드1. 불청객> 플레이 화면

해외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XR 작품으로는 <인 피 니 트>(Space explorers: The Inifnite)와 <영원한 노트르담 성당>(Le Etérnelle Notre Dame)을 꼽을 수 있다. <인피니트>는 국제우주정거장(ISS)을 직접 촬영한 실사 영상을 바탕으로 구성한 대규모 몰입형 전시로, 시간당 150명이 넘는 관객이 실제 우주정거장을 다녀온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미디어아트와 VR 경험이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정교한 모션 센싱을 통해 대규모의 관객이 동시에 가상공간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냄으로써 진짜 우주여행을 떠난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즉 XR 콘텐츠의 장소성과 다인체험을 상업적인 영역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한편 노트르담대성당이 화재를 당하기 전, 게임 제작을 목적으로 해당 공간을 레이저 스캔한 데이터가 남아 있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공간을 복원하여, 중세의 노트르담대성당에서부터 현재의 노트르담대성당까지를 환상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 바로 <영원한 노트르담 성당>이다. 현재는 복원 중인 성당의 지하에 전시 공간을 만들어 현실과 가상의 다양한 층위를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놓았고, 이에 시민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세의 모습이나 성당이 지어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탑이나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로 앞에서 보는 등 다양한 시점을 제공한다. 실제 투어보다도 생생한 관람을 가능케 한 것이다.

XR 콘텐츠의 기기적인 한계로 인해 콘텐츠의 감상이 불편하다는 인식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전술한 XR 콘텐츠의 사례를 고려하면, 관객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정교하게 연출된 XR 콘텐츠의 세계를 탐구하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디바이스나 기술의 문제보다 관객의 서사적 몰입, 그리고 설득력 있게 시뮬레이션되는 ‘스토리 월드’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이다. 혁신적인 창작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그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고, 부천영화제의 비욘드 리얼리티는 그 여정을 매년 업데이트하고 있다. 인류의 오랜 꿈이 영화 같은 삶을 사는 것, 영화 속 세상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XR이 그 꿈을 이뤄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