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와 조명감독, 아트 디렉터와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수식이 구범석 감독을 설명한다. 이 사이에는 ‘시각화’라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제는 XR을 통해 보는 것을 넘어 느끼고 경험하도록 이끌어내고 있다. 2018년 VR 4DX영화 <기억을 만나다>를 통해 360도 시야각의 영상을 구현한 이후, 그는 영화 <기생충>이 원작인 VR 콘텐츠 <기생충 VR>을 선보였다. 실감형 콘텐츠를 대중적 문법으로 풀어내고 싶었던 그는 부천영화제에서 XR영화 <시인의 방>을 선보였다. 가상공간 속에 초현실적 메타포를 숨겨두며 사용자를 안내한 구범석 감독을 만났다.
- <시인의 방>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XR로 구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윤동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그동안 내가 소비해온 대부분의 영상 콘텐츠에는 프레임이 존재한다. TV와 DVD, 멀티플렉스 극장과 소형화된 스크린까지. 그러다 보니 프레임이 없는 VR 형태로 영상 콘텐츠가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2018년 VR 4DX영 화 <기 억 을 만 나 다>를 제 작 하던 당시만 해도 해당 장르에는 자극 중심의 콘텐츠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어두운 방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 등이다. 나는 반대로 크리에이터로서 상상력을 펼치면서도 감성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살다 보면 한 대상을 지그시 바라보고 조용히 관찰하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을 제공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간송미술관에서 미디어 디렉터로 고미술을 다루면서 한국적인 것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겨났다. 특히 한글! 한글의 언어적 측면뿐만 아니라 캘리그래피같이 미형적인 부분까지 다뤄보고 싶었고, 활자의 아름다움과 문학성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인물로 윤동주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윤동주의 필체엔 그만의 울림이 있다.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태에도 작가의 심상이 담겨져 있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 XR 콘텐츠에서 시각적 몰입만큼 중요한 게 스토리텔링이다. 윤동주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가장 신경 쓴 게 뭔가.
= 윤동주 시인은 워낙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고 사인도 여전히 불명확하다. 공백으로 남은 정보 사이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던 것은 ‘시인의 삶’이었다. 중국 명동촌에 살던 그가 연희전문학교로 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기까지의 스토리가 문득 궁금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남긴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동하게 되었는지 그 결심의 바탕을 알고 싶었다. 처음에 한국적인 것과 활자의 미형에 빠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면, 윤동주의 삶에 대한 궁금증과 몰입이 이를 계속 진행하게 했다. 다만 스토리가 어렵지 않게 풀어지길 바랐다. 그래서 시인을 현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20대 청년이라고 가정했다. 그 순간 윤동주의 순수함이 돋보였다. 그의 저항의식과 시대에 대한 죄책감 등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만큼 스토리 구성 과정에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을 듯하다.
= 유럽의 한 국가에서 전쟁과 살상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한 소녀의 관점으로 자신의 가족이 총살당하는 과정을 콘텐츠로 만든 적이 있다. 총을 겨눈 사람들의 죄를 묻기 위함이었겠지만 <시인의 방>은 그런 관점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내 편과 네 편, 선과 악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는 게 목적이 아니라, 시인 윤동주의 삶과 고뇌를 돌아보는 게 원래 취지였던 만큼 본질을 잃지 않으려 했다.
- <시인의 방>이란 제목대로 공간성이 두드러진다. 방, 기차, 물속 등 다양한 공간을 비춘 이유가 있다면.
=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자기 방이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일하는 시대도 아니고, 윤동주 시인이 극히 외향적인 사람도 아니니 조금이라도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에 오래 머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바람이나 미래에 대한 예지몽이 그의 방에서 펼쳐진다. 그 방이 해체될 때마다 작은 우주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도 시인의 깊은 심연을 상징한다. 송몽규와 윤동주가 명동촌에서 개성으로 오기 위해 탄 기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순간을 말하지만, 계속 바다 위를 내달리면서 이들이 곧 일본에 가게 될 거라는 상황을 암시한다. 당시 일본에 가려면 배를 타야 했는데, 은유적인 방식으로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통 영화는 카메라가 공간 안으로 들어가 배우를 비추지만 XR은 이용자 자신이 카메라가 된다. 그래서 공간의 의미와 상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했다.
- 물에 풍덩 빠지거나 기차 뒤로 올라서거나 꿈의 언덕으로 솟구치는 등 수직적인 이동이 눈에 띈다.
= XR 이용자가 실제 몸으로 체험한다는 느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접근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로 그 상황에 놓인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전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물의 입자를 표현하거나 캐릭터를 더 정교하게 구현하는 데에 신경을 썼다. 영상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는 많은 문법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의 무의식에 그것들을 심어놨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영화가 무엇인지,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공부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다른 매뉴얼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VR에 있어서는 아직도 이를 즐기기 위해 학습하고 공부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할 인터랙티브와 경험을 조금씩 대중적으로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상윤 배우가 윤동주 시인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를 윤동주 역으로 점지한 이유가 있다면.
= 이번 프로젝트는 이상윤 배우와 꼭 함께하고 싶었다. 그의 호흡 때문이다. 배우의 호흡은 작품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바뀐다. 로맨스와 스릴러 속 인물들의 호흡이 다른 것과 같다. 이상윤 배우가 가진 원천적인 호흡법을 눈여겨보니, 그가 윤동주 시인의 안정적이고 차분하고 진중한 면을 잘 살려줄 것 같았다. 실제로도 잘 구현해주었다.
- 영상 중간중간 XR 이용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능동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이용자는 관찰자 이상의 개입을 경험한다.
= 2020년 즈음까지 VR 콘텐츠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었다.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그리고 3인칭 시점으로 타인을 관찰하는 방식. 이 두 방식을 합치기가 쉽지 않았다. VR이 잘못 설계되는 순간 불쾌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데, 시점이 자주 바뀔 때 유독 그렇다. 그러면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VR 장치를 벗어버린다. 완전히 그 세계관에서 빠져나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장면을 전환할 때 새로운 시점을 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잠깐의 휴식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버드아이뷰, 즉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장면이 전환될 때 1인칭 시점이 되는 방식으로 사용자가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왔다.
- 무엇보다 감옥에 갇혀 홀로 시간을 견디는 윤동주를 사용자가 직접 토닥이며 위로할 수 있도록 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손에 닿는 것은 없지만 윤동주와 가상으로나마 연결된 듯한 느낌을 준다.
= VR 콘텐츠 중에 인터랙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콘텐츠들이 많다. 주로 게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의 방>은 VR 시네마로서 사용자가 스토리와 감성을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윤동주를 쓰다듬지 않더라도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다만 그에게 손을 뻗고, 토닥이며 위로하는 일련의 과정은 감독으로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구간이다.
- 국내에서 XR과 영화의 접목은 어느 정도까지 왔다고 보는가.
= VR과 XR이라는 언어가 상황에 따라 지엽적으로 보일 수 있어 나는 ‘실감형 콘텐츠’라 부른다. 현재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실감형 콘텐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게임, 영화 등은 물론이고 전광판에도 입체성을 부각한 광고들이 넘친다. 미술관에도 미디어 아트 전시가 성행한다. 다만 아직 초기 단계라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을 부각하기보다는 비주얼적 요소를 반복하는 정도에 가깝다. 하지만 VR 시네마가 고도화될수록 사람들이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창작물을 선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 앞서 말했던 프레임 콘텐츠에 익숙했던 세대와 달리 VR, XR 콘텐츠가 익숙한 세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를 체감하는지.
= 그렇다. 어린아이의 경우 실감형 콘텐츠에 대한 적응력이 성인보다 훨씬 더 빠르다. 예를 들어 성인이 공통되게 힘들어하는 구간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즐긴다. 마치 세대에 걸쳐 새로운 DNA가 생겨나듯 이러한 VR 문법을 몸소 이해하는 세대가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담은 VR영화 <시인의 방>은 윤동주가 중국 명동촌에서 조국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고, 다시 일본으로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바다를 가르는 기차, 벚꽃나무로 가득한 길거리, 친구들과 함께하는 글방 모임 등 관찰자로서 윤동주의 일상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며 챕터 사이마다 그의 시대적 고민이 가득한 시들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인 윤동주와 사용자 사이에 놓여 있는 시대적·물리적 거리를 좁혀주는 일련의 인터랙션들이 인상적이다.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부문에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