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의 민(정우성)과 히딩크호의 신성 박지성, <더 화이팅>의 복싱과 시카고 불스의 농구. 춘천의 고등학생 진우에겐 TV와 만화책 속 멋진 형들과 매일 등하교를 함께하는 수많은 남자 친구들이 인생의 전부다. 친구들이 온통 반장 선아(다현)에게 빠져 있어도 진우만은 무심해 보인다. 어느 날 모종의 사건으로 선아와 얽힌 진우는 살면서 처음 ‘노력’이란 걸 해보게 된다. 운동과 공부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과업에 최선을 다해본 진우가 다음으로, 어쩌면 일평생 노력을 기울일 대상은 선아인지도 모른다. 무구한 소년의 얼굴을 한 채 설레는 첫사랑의 얼굴을 어색함 없이 꺼내 보인 배우 진영은 아직도 고등학생 진우의 에너지에 감화된 덕인지 매사에 지치지 않고 생동하는 중이다. 그에게 노력하는 남자, 노력하는 배우가 될 수 있는 여러 비결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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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일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영화의 글로벌 프로모션을 마친 후 오늘 새벽 귀국했다고 들었다.
세어보니 12년 만에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공항에서부터 “보고 싶었어요”라며 환대해주는 팬들을 보며 놀랍고 뭉클했다. 덕분에 많은 힘을 얻고 돌아왔다.
- 원작을 다섯번 이상 감상했을 정도로 이 작품의 팬이었다고. 좋아하던 작품에서 모처럼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데 부담은 없었나.
처음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땐 이게 운명인가 싶었다. 원작의 팬으로서 부담도 느꼈지만, 나만의 스타일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 합류를 결정했다. 지난여름 원작의 주연배우인 가진동 배우와 만났다. 가진동 배우는 이 작품을 찍을 때 실제로 10대 후반이었다더라. 정작 나는 18살 진우와 두배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서 걱정도 됐다. 다행히 살면서 동안이란 말을 많이 들었던지라(웃음) 그 말로부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 내 나이는 잠시 잊고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고등학생 시절의 기억을 디테일하게 짚어가며 10대 후반 특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우리 영화가 관객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학창 시절 첫사랑의 기억에 불을 지폈으면 한다. 원작의 존재를 떠나 이런 추억 소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영화다.
- 고등학생에서 시작해 대학생, 군대, 직장 등 한국 남성의 특정한 생애주기를 한 작품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왔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갈 수 있다는 메리트가 컸다. 첫사랑에 사로잡힌 학창 시절부터 그 사랑을 성인이 될 때까지 간직하는 남자의 삶까지. 그 모든 성장과정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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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라는 <비트>의 대사도 직접 인용되지만, 진우는 선아를 만나기 전까지 진로와 진학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는 친구다. 선아를 만난 이후, 진우의 인생이 새롭게 방향을 틀었다고 보아도 될까.
진우는 분명한 꿈이 없을 뿐, 목표의식은 뚜렷하다. 자신의 꿈을 정확한 언어로 정의 내리지 못해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정신 하나로 돌진해나간다. 그런 진우에게 명확한 꿈을 만들어준 존재가 선아다.
- 선아가 수능을 망친 후 속절없이 우는 장면에서 누군가를 위로해본 경험이 적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우의 모습이 귀엽게 담겨 있다.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한다. 말 그대로 순수함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 잠정적 ‘여자 사람 친구’에게 위로를 건넬 방법을 모르니 우선 목도리라도 둘러주고 내리는 눈이라도 손으로 막아주려는 진우가 귀여웠다. 사실 처음엔 진우의 소극적인 행동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너무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이더라. 지금이라면 진우에게 왜 그랬냐며 형으로서 조언을 해줄 텐데, 나 역시 그 나이였다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어설픈 모습만 보였을 것 같다. 그 장면을 찍을 때 다현 배우가 ‘찐으로’ 오열했다. 그래서 그 앞에서 당황하는 진우의 모습 중엔 실제로 당황한 나의 리액션도 일부 담겨 있다.
- 진우는 왜 선아를 오랫동안 좋아했을까.진우와 선아는 상극이다. 진우는 생각 없어 보이는 직설적인 남자고, 선아는 생각이 많고 고민 끝에 행동 하나를 옮기는 여자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런 선아가 진우에게 먼저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선아가 진우에게 성큼 다가온 순간도 명확하다. 친구가 부당한 일로 혼나고 있을 때 정의로운 진우는 늘 그렇듯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선아가 진우와 함께 친구가 당하는 불의에 저항하고, 함께 체벌을 받지 않나. 그때 선아가 진우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진우는 적극적이지만 쑥스러움이 많고, 선아는 소극적이지만 먼저 용기를 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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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시절부터 꿈꾸던 연예인이 되어 14년째 활동 중이니 극 중 진우처럼 본인도 꿈을 이룬 셈이다. 한번 꿈을 이룬 경험이 있으면 다음 목표를 세우고 꿈을 향해 나아가기 수월해지나.
더 어려운 것 같다. 어릴 땐 데뷔만 하면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 일은 끝이 없고, 연기를 하다 보면 새롭게 고민하고 마쳐야 할 숙제들이 계속 늘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음 꾼 배우라는 꿈은 정답이 없고 난이도를 정할 수 없어 재미있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매번 다양하고.
- 차기작은 국제 프로젝트다. 대만영화 <1977년, 그 해 그 사진>에서 대만의 라이징 스타인 이목 배우와 로맨스 연기를 펼친다고.
얼마 전 크랭크업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대만 분들인 현장이었다. 중국어 대사를 최대한 연마해갔는데, 다행히 내 역할은 한국인 코치여서 약간 서툰 중국어 억양이 용인됐다. (웃음) 치열하고 집요한 대만의 촬영 현장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 작품이 시대극이라 당시 의상을 입어야 했는데 의상 피팅을 한벌당 7~8시간은 한 것 같다. 무엇이든 하나를 완벽히 마쳐야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현장이어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새기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