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득도한 대가가 만든 오락영화, <자토이치> [3]
2004-01-29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역사적 캐릭터를 해체하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를 리메이크하면서, 기타노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에 도전한다고나 할까. 시대극의 ‘시간’을 지워버리고, 머리까지 금발로 바꿔버린다. 아니 가장 중요한 신체적 특징까지 초월해버리고, 자토이치의 사회적 존재까지도 틀어버린다.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는 차별받는 약자의 편이었고, 그런 부류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차별과 차별받는 자의 위치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대세’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늘 허리가 굽어져 있었다.” 하지만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유랑하는 자유인이다. 동류의식으로, 억압자에 대해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승부를 위하여 싸운다. 근원을 따진다면 가쓰 신타로의 자토이치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쓰바키 산주로와 닮았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녀석들 중에 제일 나쁜 건, 자토이치라고 생각한다. 이 녀석만 그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과 백성들이 기뻐했기 때문에, 그나마 통할 수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곳에서 자토이치는 최후까지 외부자인 것이다.” 그렇게 기타노 다케시는 잔혹하다. 그들을 ‘위해서’라고, 기타노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다른 목적이었지만, 우연히 합치된 것뿐이라고 냉철하게 부연한다. 하지만 그런 잔혹함은 또한, 시골 아낙네에게 안마를 해주고, 위험에 처한 남매를 구해주는 상냥함과 등을 맞대고 있다. <소나티네>에서 해변으로 간 흉포한 야쿠자들이 천진하게 놀이를 하는 모습은, 기타노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자토이치는 ‘잔혹한 상냥함’으로 마을 사람들을 긴조 일당에게서 구해내지만, 거기에는 어떤 대의명분이나 울분과 분노 같은 것이 없다.

새롭게 만들어진 <자토이치>는 다케시만의 스타일로 변주되어 있다. 우리에겐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사무라이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자토이치의 검술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쓰 신타로가 칼을 휘두르는 방식을 보면 위부터 휘둘러 떨어뜨리는 느낌이지 않는가. 검을 좌우로 움직이면서 전진하면 상대역은 쓰러진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도 괜찮았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전혀 ‘베인다’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도한 접근전으로 설정해 칼을 빼는 순간 삭 베어지는 느낌을 냈다.” 기타노 영화의 액션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순간 폭발하는 것이었다. 불꽃놀이처럼, 타오르다가 순간 터져버린다. 일상적이지만, 너무나 잔혹하여 보는 순간 흠칫 놀라게 되는 듯한 폭력. 그것은 갑작스럽고, 당돌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다. <하나비>에서 젓가락을 상대의 눈에 그대로 꽂아버리는 장면처럼. 그 풍경은 <자토이치>의 도박장 장면으로 연결된다. 속임수를 쓴 상대의 손을, 말 한마디에 이어 바로 잘라버린다. 너무 돌발적이어서 놀랄 시간조차 없다. 기타노 다케시는 과거의 시대극을 보면서 ‘속도’에 불만을 느꼈고, <자토이치>에서 속도를 한껏 올린다. 모든 승부는 돌발적이고, 순간을 잡아채는 것이다. 떠돌이 무사인 하토리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첫수에 상대를 어떻게 가를 것인지, 어떻게 막고 역공을 가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영화 속에서 보여줄 검술의 합을 생각해왔다는 다케시의 말처럼, <자토이치>의 칼싸움 장면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세상을 융화시키는 축제

코미디언은 일상의 작은 일들을, 자기만의 형식으로 변형시킨다. 비웃음을 사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던, 그저 어이없어 웃던, 그것 모두가 우리 현실의 뒤틀린 반영이다. 또 하나의 판타지다. <자토이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탭댄스는 유쾌한 축제의 장으로, 모든 것을 융화시킨다. “옛날 시대극을 보면 라스트신에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노래와 마을축제의 춤장면이 나온다. 이번에 ‘시대극에 들어가는 필수요소들’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전부 넣어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은 꼭 마쯔리로 하고 싶었다. 그때, 탭댄스의 이미지가 떠오른 것뿐이다. 그냥 갑자기 탭댄스가 나오면 된다는 느낌이 있으니까, 전주로서 종소리나 목수들의 목재를 두드리는 소리, 빗소리 등을 퍼커션 삼아 전체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엔딩부터 리듬을 거꾸로 세어 전체를 만들어나갔다는 느낌이다.” 탭댄스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있다. 논 버벌 댄스는 심장의 움직임처럼, 격렬하게 관객을 동요시킨다. 그 안에는 원초적인 카오스가 존재한다. <자토이치>의 마지막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세계로 수렴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남매의 복수도, 떠돌이 무사의 욕망도, 자토이치의 무심한 칼도 활기찬 탭댄스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사랑도, 증오도, 분노도, 결국은 하나로 돌아가버린다. 기타노는 우리 인생의 비의(秘意)를 알고 있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한없이 자유롭다. 이제는 정말, 자신이 놀고 싶은 대로 논다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감독’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더이상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을 욕망하지 않게 된 상태에서의 오락. 또한 기타노는 <자토이치>에서 사무라이영화, 혹은 <킬 빌>이 오마주를 바친 참바라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CG와 홍콩 액션이 양분한 액션영화의 흐름에서, <자토이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자토이치>는 즐겁고, 흥겹다. 마지막의 탭댄스 군무는, 미리 예견된 것이다. 논에서의 장난과 목검으로 치고받는 장면들은 모두 리드미컬하게 영화의 흐름을 잡아챈다. 그 잔혹한 살육이 벌어지는 한편에서, 그렇게 흥겨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축제란, 그렇게 잔혹한 현실을 승화시키는 해방구 아니던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이제 그 피안의 땅으로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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