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새로운 물결, 디지털 장편영화 [3]
2004-11-1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필름과의 경계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본당선언>
<바이칼>

지난해 부산에서 소개된 디지털 장편은 <그 집 앞>과 <자본당 선언>이었다. <그 집 앞>은 일기 혹은 사적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극영화이며, <자본당 선언>은 키치적 유희정신과 발랄한 실험성이 결합된 극영화다. 두 작품에는 디지털이 지닌 개인적이며 자유분방한 속성이 깊이 투영돼 있다. 그러나 올해 소개된 세 디지털 장편은 필름과 구분되는 기술적 속성보다 필름과 공유한 기록매체의 속성에 충실하다. 그것은 올해 상영작에 포함되지 않은 디지털 장편들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거리로 나간 혹은 거리로 돌아온 것은 디지털카메라만은 아니다. 뉴커런츠 부문에서 상영된 다른 두편 <여자, 정혜>와 <귀여워> 역시 오늘 이곳의 삶을 담는다. 이 영화들은 필름으로 촬영된 충무로영화지만, 이들은 세 디지털 장편의 영화적 태도와 더 가깝다. 디지털 장편의 장르적 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아나모픽>이나 윤영호의 <바이칼>은 SF이며, <역진화론>과 <프락치>는 심리극에 가깝다.

한국에서도 디지털 장편의 품은 필름과의 경계를 서서히 지워가며 넓어지고 있다. 머지않아 영화산업의 울타리 안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들어서고 있다. 최근 KBS와 MBC는 각각 영화진흥위원회, 싸이더스와 손잡고 저예산 HD영화 프로젝트 계획을 발표했다. 영화산업의 막강한 포섭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장편이 새로운 물결의 전조가 된다면, 그것은 그 친숙한 매체를 들고 거리로 나서 살아 있는 역사에 다가가려는 젊은 창작가들의 분투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글은 지난해와 올해 <씨네21> 부산영화제 데일리에 필자가 쓴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독립 디지털 장편 제작지원 당선작 3편

디지털 장편영화의 새싹들

영진위에서 시행하는 독립 디지털 장편 제작지원 사업은 디지털 장편을 준비하는 감독들에게는 중요한 터전이다. 지난 10월 중순에 발표된 2004년 최종작에 조은희 감독의 <내부 순환선>, 안슬기 감독의 <다섯은 너무 많아>, 김선 감독의 <외부 경제>가 선정됐다. 디지털 장편영화의 미래에 뛰어들 ‘신작’들이 지금 운신 중이다.

<내부 순환선>은 이름이 같은 남녀 두 인물이 주인공이다. 클럽 디제이로 일하는 영주(여), 내부 순환선의 기관사로 일하는 영주(남). 사랑은 이들 각자를 가해자로도 피해자로도 만들면서 서로 순환한다. 동국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하여 <순간> <spin> 등을 만든 조은희 감독은 <내부 순환선>이 “인간의 순환 관계에 대한 영화, 사랑 때문에 패배한 루저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이번 영화는 현재 재학 중인 시카고예술대학 졸업작품이다.

한겨레 영화제작학교를 나와 <사랑 아니다> <kiss me please> 등을 만들었고, 노동석 감독의 <마이 제너레이션>에 출연하여 ‘사채업자’ 역을 리얼하게 연기하기도 했던 안슬기 감독은 “가출한 소년과 노처녀의 대안가족 만들기”에 관한 영화 <다섯은 너무 많아>를 만든다. 시내는 서울에서 돈을 벌어 남동생의 대학 뒷바라지를 하며 산다. 우연히 동규와 시내는 서로 알게 되고, 시내는 동규를 보살피게 된다. 또 시내는 조선족 출신의 영희까지도 집에 데려온다. 월급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 영희를 위해 시내와 동규는 함께 사장에게 복수를 하러 가지만, 그의 불쌍한 사정을 듣고 다시 또 집에 데리고 들어온다. 영화는 이렇게 새로운 가족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한편, 정치와 철학을 소재삼아 꾸준하게 디지털 작업을 해온 영화집단 곡사(김선, 김곡)는 “역사적인 질감을 정교하게 담기 위해” 이번에는 HD에 도전할 생각이다. “철거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상황과 전쟁이라는 역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마초 아저씨의 우화”라고 <외부 경제>를 소개한다. 헌팅을 다니면서 시나리오가 계속 바뀌고 있다는 그들의 영화는 “경제발전의 외부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세편 모두 프리프로덕션 단계에 있으며, 올 12월이나 내년 1월 중에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디지털 장편영화가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