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여관방에서 35mm 카메라 움직일 수 있어?
<프락치>는 무려 7년 만에 완성된 영화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1996년 말, 황철민 감독은 귀국 준비를 할 무렵 만났던 학원프락치를 소재로 시나리오를 썼다. “프락치로 지목되어 재판이 진행 중이던 와중에 독일로 도망온” 그는 황 감독에게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안겼는데, 그 안에는 운동권 학생들의 결혼식 장면을 비롯해서 안기부 기관원과 함께 여관방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 담겨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그런 생활에 대한 한탄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는 후덥지근한 여름, 정체가 드러난 프락치와 그를 감시하는 기관원이 세상의 눈을 피해 여관방에서 함께 장기 투숙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묘사한 <프락치>의 모티브가 됐다.
하지만 프로젝트 진행은 더뎠다. 1997년, <낙타> <선택> 등과 함께 제1회 PPP에 선정됐지만, <프락치>에 필름을 내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프락치>를 속으로 삭이는 동안 그는 <옥천전투>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등의 다큐멘터리와 <삶은 달걀> <그녀의 핸드폰> 등의 극영화를 만들면서 “누구나 소유 가능하며 또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날렵하게 포착할 수 있는” 디지털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독립영화 진영에서 그를, 디지털 장편영화를 앞서 고민한 감독으로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황 감독은 왜 하루빨리 찍고 싶어했던 <프락치>를 디지털 장편영화로 완성하는 데 망설였을까.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프락치>는 35mm 필름으로 만드는 게 훨씬 매력적이라고 봤다. 헛물을 켠 셈이다. (웃음) 그래도 현실에서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라고 봐서 디지털로 찍었다. 의문사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된 것은 아니니까.
-필름 작업을 염두에 뒀던 이유는.
=필름이 진짜 가죽 점퍼라면 디지털은 가짜 비닐 점퍼 같다. 원색의 강렬함으로 선명한 세계를 구현하지만, 이는 세계를 특징화하고 단순화함으로써 가능하다. 반면, 필름은 색감이 다양하고, 그래서 서사적인 풍부함이 가능하다. 디지털이 사물이 발하는 순간의 광채를 잡아낸다면, 필름은 사물에 깃든 때를 보여준다. 리얼한 세계를 그리고 싶었던 <프락치>는 디지털과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 고민이 많았겠다.
=<프락치>에서 카메라는 누군가를 고발하는 감시기구이고, 프락치와 기관원이 함께 갖고 노는 놀이기구이기도 하고, 프락치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표현기구이기도 하다. 실제 영화 속에서 온갖 매체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디지털카메라로 두 사람의 연극을 찍고, 또 그걸 35mm 필름으로 잡아내고 싶었다. 그게 안 되어서 촬영 때 소니의 VX-1000이나 PD-150 대신 파나소닉 카메라를 써서 영화 같은 거친 느낌이 나도록 했다. 주로 방 안 장면이 많은데 인물의 그림자를 잡는다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인물들의 디테일한 표정을 잡아내고자 노력했다. 올해 인디포럼에서 상영됐던 건 디지털 버전인데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의 디지털 장편영화 배급지원작으로 선정돼서 키네코 작업을 했다.
-<프락치>를 만들면서 디지털 작업의 매력은 못 느낀 건가.
=그건 아니다. 경제성은 두말 할 것 없지 않나. <프락치>의 경우, 3천만원으로 15일 동안의 촬영을 마쳤다. 효율성도 빼놓을 수 없다. 좁은 여관방에서 35mm 카메라를 움직일 수 없었겠지. 연출과 촬영을 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카메라를 조금만 움직여도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재미라면 <그녀의 핸드폰>(2001) 때 많이 느꼈다. 시나리오도 없이 제작비 100만원으로 3박4일 동안 3명의 배우와 동행하면서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는 거였다. 배우들은 서울을 2시간 동안 빙빙 돌면서 강원도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서 부여해야 했다. 가능할까 싶었는데 과정에서 관계와 감정과 갈등이 생겼고 결국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디지털 장편영화가 단발성 성취를 넘어서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순식간에 나와서 동시대인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부터 제작까지가 길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식 장사꾼인 전문 프로듀서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시장이 없으면 상품이 만들어지지 않고, 이 모든 것은 우연이 만들어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