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새로운 물결, 디지털 장편영화 [2]
2004-11-13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오늘 이곳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마이 제너레이션>

여기서 다시 물어보자. 디지털영화란 무엇인가. 넓은 의미의 디지털영화는 촬영, 제작, 배급의 어떤 단계에서든 디지털의 기술적 속성이 개입한 영화다. 그 모든 과정에 디지털이 개입하는 전면적 디지털시대의 영화의 운명에 대해선 매체 민주화의 완성에서부터 영화의 종말에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건 이 지면에서의 관심사는 아니다. 디지털영화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영화에 한정할 때, 그것은 디지털과 관계된 어떤 것이 아닌 영화 자체로 먼저 말해져야 한다.

디지털에 관한 많은 말이 있었지만, 여전히 분명한 건 그것이 필름에 비할 수 없이 싸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디지털의 방대한 파급효과와 기술주의적 담론에 가려져 종종 간과된다. 유난히 돈이 많이 드는, 그래서 그로 인한 갖가지 구속을 내면화해야 하는 영화라는 분야에서 돈으로부터의 자유는 중대하다. 최근의 디지털 장편이 보여주는 미학적 약진은 디지털의 기술적 속성과 직결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유로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두 번째 사실은 선정된 영화들이 모두 오늘의 거리가 무대인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바로 이 영화들이 빚어내는 거리의 풍경과 정서였다. 오늘의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오늘의 거리에서 촬영됐다는 건 범상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올해 5월 <씨네21>이 마련한 좌담에서 김소영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성공작들은 거의 다 세트를 잘 지어서 성공한 영화들이다. 세트 문화는 자본의 성숙도를 대변하지만, 특정한 서사의 욕망도 말하는 중층적 의미가 있다. 영화산업이 세트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비정치적 욕망이 있고 그것이 대중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세트를 세우는 순간 그 안으로 함몰돼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세트의 유무는 영화의 가치나 자질과 무관하다. 고전기 할리우드의 많은 걸작들은 정교한 세트에서 태어났다. 최근 한국영화들의 두드러진 양식미가 섬세하게 조성된 세트에 힘입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또한 시간성이 끊임없이 파괴되는 한국의 공간이 지닌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은 가까운 과거를 다룰 때조차 세트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영화의 유별난 세트 애호는 오늘의 시공간으로부터의 집단적 이탈과 함께 일어난 현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공교롭게도 강우석, 강제규, 이재용, 유하, 송해성 감독의 전작은 모두 오늘의 서울이었지만 최근작에서 모두 과거로 이동했다. 김지운, 박찬욱 감독의 경우엔 여전히 오늘이 무대지만 인공적인 세트 안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갔다. 이를 미장센의 세련화나 영화적 시간의 확대라고만 말하기엔 어딘가 허전하다. 장르의 장인으로 혹은 젊은 작가로 인정받아온 유능한 감독들이 한꺼번에 오늘의 시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양아치어조>
<신성일의 행방불명>

<마이 제너레이션>을 비롯한 세 디지털 장편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들의 주인공들은 선배 감독들이 떠난 2004년의 한국 대도시를 혹은 지친 모습으로 혹은 들떠서 혹은 고뇌하며 걷는다. 물론 이 작품들에 눈길이 쏠린 이유는 그것의 피사체 자체에 있지는 않다. 이들은 거리의 생리학이라 부를 만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오늘 이곳의 공간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포착한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대도시의 남루한 뒷골목과 그곳의 생존 메커니즘의 연관에 대한 예민한 포착이다. 여주인공이 사채업자를 따라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는 ‘카드깡’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양아치어조>는 섬세한 공간 묘사에 집중하기보다는 강북과 강남이라는 거주 공간이 곧 계급을 결정하는 서울의 생태를 넓은 시야로 포착한다. 두 지역은 외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존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우리의 거주 공간을 거대한 식탐의 소굴로 묘사하는 뛰어난 관찰을 보여준다. 꼬마 성일이 거지 성자의 모습으로 허름한 식당가를 순례하는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영화사의 새로운 물결이 항상 번잡하고 양식화를 거부한 채 번잡한 거리에 카메라를 들고 나선 젊은 감독들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들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세 디지털 장편은 그런 점에서 2004 한국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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