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흔한 이야기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연출작 전부인 두편의 단편(<장마> <어떤 여행의 기록>)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젊은 감독이 충무로에서 장편 데뷔를 준비했고, 2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뒤, 캐스팅까지 완료된 프로젝트가 제작불가 판정을 받는다. 안타깝지만 현실에 비일비재한 일화일 뿐이고, 그 주인공인 조범구 감독도 이를 알고 있다. 이 서글픈 일화가 전환되는 계기를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그 시점을 전후하여 조범구 감독이 겪은 갖가지 내우외환 속에서 맞닥뜨린 “정신적 공황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는 “안 하면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첫 장편을 무작정 시작했고 <양아치어조>는 그로부터 1년 반 뒤 완성됐다. 거미줄처럼 얽힌 채무관계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저당잡힌 인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양아치어조>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보험료 1억5천만원을, 친구들의 빚을 ‘얼떨결에’ 갚아주느라 아낌없이 써버린다.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작은 영웅”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감독의 변이다. 조범구 감독은 직접경험을 그나마 ‘순화’시켜 그린 이 영화를, 자신의 힘겨운 젊은 날을 어른스러운 누군가가 따뜻하게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심정을 담아 완성했다고 회고한다(실제로 영화의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전지적 내레이션은 영화계의 ‘어른’, 안성기가 맡고 있다).
이제 조범구 감독은 첫 장편 디지털영화를 완성한 뒤에야, 자신이 선택의 여지없이 맞닥뜨린 디지털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선택한 영화가 그에게는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영화를 찍는 한 방법일 뿐인 디지털 역시 그의 절대적인 고민지점은 아니다.
-1억8천만원의 제작비는 충무로 바깥에서 감당하기에 적지 않은 예산이다.
=뭐든지 해야 할 것 같다는 절박함으로 오래된 프로젝트를 꺼내들었다. 당시 내가 변통할 수 있는 돈의 최대치가 1천만원이었고, 그 돈으로 장편을 완성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영진위에서 사전제작지원으로 3천만원을 받으면서 일반 6mm 카메라가 아니라, 디지베타로 찍겠다고 결정했다. 경험적으로 극장 상영시 그나마 화면 열화가 덜한 것이 디지베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HD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고. 이후에 고생하는 스탭들에게 교통비라도 쥐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지원을 요청하러 청어람 사무실에 들렀다가 만난 최용배 대표가 제작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말을 꺼낸 뒤, 이 정도 규모를 갖추게 됐다.
- 디지털 작업은 처음이다. 이전의 필름 작업과 비교한다면.
=아직까지 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과정에서 필름이 가장 편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내내 감독을 포함한 모든 주요 스탭들 중에서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디지털영화를 완성할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시행착오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갖가지 ‘삽질’ 끝에 영화를 완성하고보니 어렵사리 극장에서 영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이번에는 디지털 상영의 전문가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영화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까.
=인물에 대한 깊숙한 개입이 가능한 매체라는 점이 필름에 비해 디지털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것은, 디지털을 통한다면 모든 후반공정을 일원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내가 아는 한 현상소 건물 안에는 HD 영화제작에 필요한 모든 공정, 촬영에서 시작해서 사운드 믹싱을 제외한 모든 후반작업까지를 소화할 수 있는 시설이 구비돼 있다. HD가 점점 일반화한다는 전제하에 돈과 시간이 절실한 독립영화인들에게 현상소, 각종 편집실과 색보정을 들락거리면서 진을 빼는 후반작업과정을 한곳에서 해결하면서, 긴밀하게 연계된 스탭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계획은.
=몇개의 프로젝트가 있다.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필름, HD, 일반 DV6mm 중 무엇이 더 적합한 것인지 생각한다. 가능한 여건 속에서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