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새로운 판짜기를 위한 기회”
황규덕 감독의 13년 만의 복귀작 <철수♡영희>는 처음에는 감독 30인의 릴레이로 시작해서 외로운 마라톤으로 마무리된 작품이다. 2003년 10월, 30명의 영화감독들이 뉴시네마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6개월에 10편의 디지털 장편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의 선봉으로 낙점된 것이 <철수♡영희>. 그러나 주최쪽으로부터 촬영 하루 전까지도 약속된 제작비 2억원은 조달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제작비는 소식이 없고 황 감독은 주최쪽에 계약파기의 내용증명을 보냈다. 사흘 뒤 황 감독은 <철수♡영희>를 자체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2003년 11월30일, 촬영에 돌입했다. 애초 사용하려던 HD영화제작용 파나소닉 HDC-27F(일명 베리캠)카메라는 예산문제로 파나소닉 DVX-100으로 바꿔야 했다. 자가용을 처분하는 악전고투 끝에 <철수♡영희>는 완성됐다. 제목 그대로 작품은 대전 대덕초등학교 4학년3반의 철수와 영희가 빚어내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차분한 영희의 기억과 그녀를 위해 몸을 던지는 들뜬 철수의 현실이 씨줄과 날줄을 이룬다. 8mm로 시작하여 35mm 장편영화 두편, 방송사 외주드라마와 프랑스에서의 다큐멘터리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거친 중견감독에게 워밍업 개념으로 접근한 ‘디지털’은 새로운 시각를 던져주었다. “당시만 해도 24프레임이 가능한 디지털카메라가 출시된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는 황 감독은 이제는 “순제작비 4억∼5억원 규모의 디지털영화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을 필생의 목표로 제시할 만큼 디지털의 효용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
-오랜만의 작업이 디지털이다. 이제까지 겪었던 다른 매체와의 변별점이 있다면.
=동아리에서 처음 영화에 입문할 때 사용한 8mm의 후반작업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선명해진다. 유리창에 습자지를 대고 서클룸 밖에서 영사기를 비춘다. 성우 역할의 친구들은 안에서 3천원짜리 마이크로 카세트 녹음하듯이 마그네틱 스트라이프에 대고 녹음했다. 35mm 아날로그 때는 믹싱룸에 15명이 들어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은 다르다. 프랑스에 있을 때였는데 옆방에서 CF 믹싱을 했다. 장비만 쌓아놓고 혼자 믹싱을 하더라.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원래 계획했던 대로 2억원. 대전 올 로케가 아니었다면 훨씬 줄었을 것이다. 숙식비만 5천만원이 들었으니까. (웃음) 물론 매킨토시 G5를 구입한 이득도 있다. <철수♡영희>는 CG가 꽤 있어서 장비 구입이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었다.
-디지털 장편이 독립영화 진영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카데미에서 처음 디지털 과정을 교과로 편성하자 반발이 심했다. 학생들은 “필름작업할 시간을 뺏는다”거나 “비용 절감을 위해서”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현재는 아카데미에만 디지털 편집장비가 20대가 넘는다. 옵티컬이나 키네코(디지털영화를 필름영화로 전환) 작업은 엄청난 비용은 물론이고 치명적으로 시간을 잡아먹는다. 디지털을 사용하면 예전처럼 녹음실이나 편집실 스케줄을 잡으려고 일주일씩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 넓게 보면 모든 연출 지망생이 상업영화에 순종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작업 매체로 뭘 선택할 것인가? 35mm필름카메라 1일 렌털료가 100만원이다. 필름값은? 결국 독립장편에서는 디지털이 대안이다.
-디지털 작업을 계속할지 궁금하다. 디지털 장편의 향후 영향에 대해서는.
=차기작은 명필름에서 준비하는 <노근리 사건>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난 기획자에 가까운 기질 같다. 순제작비 4억∼5억원선, 마케팅비 2억원 정도로 6억∼7억원짜리 디지털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기획하는 게 꿈이다. 그런 작품들이 연간 제작영화의 40%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엘리펀트>를 봤다. 극장을 나설 때까지 HD영화라고 느끼기 어려웠다. 디지털 영사시스템과 소프트웨어의 발전이 동반된다면 디지털 장편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판짜기를 위한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