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오 아르젠토의 <트라우마>는 그가 처음으로 만든 미국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라고 못 박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미국 자본을 빌어 미국 땅에서 미국 배우들을 기용해 촬영되었다. 혹시 엉터리 영어 더빙 대신 진짜 영어 대사를 넣은 아르젠토 영화가 어떨지 궁금해 본 적 있는지? <트라우마>를 보면 된다.
무대는 미국으로 옮겨졌지만, 아르젠토의 팬들에게 <트라우마>의 내용은 안전할 정도로 익숙하다. 검은 장갑을 낀 연쇄 살인마가 비 오는 날마다 사람들을 죽인다. 단지 이번 살인마는 칼을 쓰는 대신 실로 희생자의 목을 잘라내는 기계를 쓴다. 어쩌다가 살인에 연루된 거식증에 걸린 여자 주인공과 그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남자가 살인범을 찾아 나선다. 보다보면 그의 이전 영화들 제목이 마구 떠오른다. 특히 <딥 레드>가. <딥 레드>에서 사용된 ‘사실 난 살인범의 얼굴을 봤어!’ 트릭은 이 영화가 더 낫다.
<트라우마>는 좀 수상쩍은 영화다. 일단 이 작품이 무척이나 아르젠토답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잔인무도한 살인, 종횡무진 영화 속의 공간을 질주하는 카메라, 맥 빠진 연기와 스토리 심지어 (주연인 딸 아시아를 뺀다면) 진짜 영어권 배우들을 써서 미국식으로 찍었는데도 여전히 생기 없는 대사들... 좋건 싫건, 아르젠토와 늘 함께 따라다니던 요소들이다. 진정한 아르젠토 팬들이라면 이 모든 것들을 온 몸으로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고, 같은 도구들을 그대로 사용된 영화지만 <트라우마>는 은근히 함량이 떨어진다. 특히 미국 로케이션의 따분한 이미지는 그의 호사스러운 이탈리아 영화들에 비교하면 심하게 재미없다. 배우들은 오히려 더 질이 좋은데도 아르젠토의 어처구니없는 세계에 도대체 적응을 못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트라우마>는 미국인들이 트레이싱 페이퍼로 아르젠토의 기존 영화를 모사한 것처럼 보인다. 넣을 건 다 넣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앵커베이에서 나온 DVD의 수준은 중간 정도. 영화의 비주얼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디테일이 약하다. 감독의 원래 의도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재미없는 건 마찬가지. 사운드 역시 호러 충격을 주기엔 약하고 전체적으로 모든 음향이 뭉개져 있는 것처럼 들린다. 자막은 없지만 영어 클로즈드 캡션이 지원된다.
부록들의 구성은 평범한 편이지만 몇몇은 상당히 알차다. 특히 ‘Love, Death, and Trauma’라는 제목의 아르젠토 인터뷰와 아르젠토 전기 작가인 앨런 존스의 음성해설은 꼭 확인해보시길. 투박한 홈비디오인 ‘On Set with Tom Savini’는 촬영장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