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때인 1997년 어학연수차 뉴욕에 갔던 하정우는 우연히 한 영화학교 학생들의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오전에는 어학 수업, 저녁에는 영화 촬영이라는 바쁜 나날 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던 그는 두손 모아 기도했다. “하나님, 저 여기서 제대로 된 영화 한편 찍게 해주세요.” 그리고 9년 뒤 그의 소망은 이뤄졌다. 올 여름 그는 뉴욕에서 촬영된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에 남자주인공 지하 역으로 출연했다. 그가 2006년을 “믿을 수 없었던” 한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희망이 이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등 지난해 말의 기세를 몰아 올해 김기덕 감독의 <시간>과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에 출연했고, 결국 ‘충무로 차세대’ 리스트 최정점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펼쳤던 그는 <시간>에서 대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깔끔하게 보여줬으며, <구미호 가족>에서는 나사 풀린 듯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그는 “지금은 정말로 또다시 시작한다는 느낌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쩌면 그 사이 나의 목표와 기대치가 커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목표와 기대치’가 올라간 계기는 5월의 칸영화제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함께 칸에 갔던 그는 하늘의 별 같은 세계적 영화인들을 접하면서 스포트라이트 가득한 레드 카펫을 밟고 싶다는 욕망을 절감했다. <네버 포에버>를 택한 것도 칸영화제를 다녀온 뒤였다. “세계무대로 나가는 것은 어릴 때부터 품었던 욕망이었는데 그동안은 가슴앓이만 하다가 칸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됐다.” 고모부가 미국인이고 이모와 이모부가 영어교사라 어릴 적부터 영어를 익혀왔다는 점은 그의 당찬 도전에 날개를 달아줄 것.
최근 2개월 동안의 휴식을 끝내고 하정우는 숨가쁜 일정을 다시 시작한다. 12월 중순부터 “아트영화 전문배우라는 선입견을 벗고 좀더 대중적 인지도를 갖기 위해” TV드라마를 시작하는 그는 비슷한 시기에 예술성 짙은 영화에 출연하며, 내년 상반기에는 윤종빈 감독의 신작에 참여한다. 세계무대에 서기 위한 그의 꿈도 내년에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부산영화제 당시 이현승 감독이 표현했던 것처럼 “하정우의 대표작은 넥스트”임에 틀림없다.
윤종빈 감독이 본 하정우
“그는 힘있는 배우인 동시에 느슨하게 풀어주는 센스까지 갖춘 배우다. 그리고 그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의 집에 가봤는데 DVD가 400장 정도 있었다. 로버트 드 니로와 조니 뎁처럼 그가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는 모두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찍을 때 아이디어가 많다. <용서받지 못한 자> 후반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 장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가 굉장한 배우가 될 것이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