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캐릭터가 옷이라고 한다면, 오직 한벌의 옷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있다. TV시리즈 <웨스트 윙>에서 대통령 보좌관 조쉬 라이먼을 연기한 브래들리 휘트퍼드도 그 경우일 것. 훤한 이마, 곱슬머리, 각진 턱 등 별 특징없는 얼굴을 가진 그가 대중의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건 시속 60km의 말을 순식간에 쏟아내면서 비서 다나와 티격태격하는 조쉬라는 캐릭터 덕이었다. 그가 이후 TV시리즈 <선셋 스트립의 스튜디오 60>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프로듀서 대니 트립 역을 맡은 것도 <웨스트 윙>의 조쉬 없이는 불가능했다. 사실 <웨스트 윙> 이전의 휘트퍼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휘트퍼드는 그동안 삼촌을 막 대하는 제당회사 부사장(<여인의 향기>)이나 뺀질거리는 에이전트(<뮤즈>), 양심불량 변호사(<필라델피아>)나 악덕 비즈니스맨(<빌리 매드슨>) 등 매우 적은 비중의 “여피 쓰레기 역할”로 출연해왔기 때문이다.
휘트퍼드에게 <웨스트 윙>의 조쉬 캐릭터는 그를 빛나게 한 비단옷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민주당이 장악한 백악관에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조쉬는 그 자신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부시를 반대하는 정치광고를 자비로 만들었을 정도로 확고하다. 배우이기도 한 아내 제인 카츠마렉과 함께 ‘The Clothes Off Our Back’이라는 재단을 운영하며 불우 어린이를 도울 뿐 아니라 총기 통제, 낙태 합법화, 지구 온난화 방지 등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그는 민주당적 가치 구현을 자신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생각하는 사려 깊은 배우이기도 하다. 사회적 실천을 마다지 않는 배우 브래들리 휘트퍼드를 좋아하는 것인지, 투철한 직업의식과 유연한 사고를 조화시킬 줄 아는 조쉬 라이먼이라는 드라마 속 정치인을 좋아하는지 헷갈리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둘 모두 희귀하고 값진 존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