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영국 악센트에 대한 취향 때문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찍 담당영화사에서 <골2: 꿈을 향해 뛰어라>를 보는 동안, 단지 그가 데이비드 베컴을 연상시키는 금발의 꽃미남 실력파 미드필더라거나 여자와 파티를 좋아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코치와 감독을 애먹이면서도 천진난만한 미소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는 철부지 청년이라서 좋아했던 건 아니었단 말이다. 뻔한 금발에, 전형적인 귀염둥이(라고 쓰고 바람둥이라고 읽어도 좋다) 캐릭터인데 말씨까지 뉴욕 토박이라면 왠지 심심하다. 대한민국 경상도·전라도 말씨, 미국 남서부 깡촌의 억양, 영국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악센트. 좋은 표현으로는 쿨한, 좀더 솔직한 묘사로는 퉁명스러운 이런 억양들이 도회적인 느끼함과 부조화를 이뤘을 때 생기는 스파크를 본 것이다. 후배를 옆에 세워두고 “이래야 몸값 안 떨어져. 나이들어 보이면 끝장이야”라며 눈가 주름 위에 백색 컨실러를 슥슥 바르고 휙 사라지던 뒷모습. 스스로 제 인생을 망치고 있음을 알면서 부러 더 능청과 여유를 내세우던 초라한 자존심. 그것이 시니컬한 영국 악센트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날 아침 나는 그렇게까지 그에게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준벅>에서도 그는 예외없이 영국 악센트로 자신의 첫 대사를 시작했다. 그의 댄디한 외모에 반해 연상의 미술관 큐레이터 여성이 접근해온다. 곧이어 벽에 기대어 선 채 뒤엉킨 두 사람. 여자가 묻는다. “잠깐. 근데 자기 어디 출신이라고 했지?” 니볼라 왈. “노스캐롤라이나.” 문제는 이것이 영화 속 그녀만의 착각이 아니었단 점이다. 나 역시 철석같이 그는 영국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IMDb 사이트를 뒤졌을 때 분명히 ‘Date of Birth’난에서 “28, June, 1972, London, England, UK”라고 써 있는 걸 봤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차라리 더 믿겠다 싶은 알레산드로 니볼라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태생이다. 예일대를 나왔고 영문학을 공부했다. 내 기억엔 그 예일대도 옥스퍼드로 남아 있다. 영국 여배우 에밀리 모티머와 결혼한 것도 동향끼리의 합이려니 수긍했다. “다들 내가 영국 출신인 줄 알죠. 알아요, 나도. (웃음)”
조각가 할아버지, 미술가 어머니, 정치학 교수 아버지의 유전자를 고루 받고 자란 니볼라는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헬렌 미렌의 연하 연인으로 프로 데뷔를 치렀다. 몇년 전 <골2…>보다도 먼저 봤던 영화 <로렐 캐년>에서 그가 엄마뻘 연상의 여인과 그 딸의 마음까지 흔드는 귀여운 록뮤지션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케이트 베킨세일 모녀를 자신의 미소 앞에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버리던 천진하고 퇴폐적인 매력. 평범한 미국식 악센트로, 그러나 매우 지적인 화법으로 <CNN>과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그가 좋은 건, 이제 전혀 다른 매력의 인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 얄미운 거짓말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