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의 놀림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간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스티브 카렐)를 따라잡기 위한 데이비드(폴 러드)의 웃지 못할 추격전이 시작되는 순간, 폴 러드에게 반했다. 집요하게 지분대다가도 미적지근하게 편을 들어주고, 그러다 어느새 놀림의 행렬에 동참하는, 한껏 사악하지도 힘껏 선하지도 않은 평범함. 13년 전, 그에게 청춘스타로서는 거의 유일한 스타덤을 안겨줬던 <클루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폴 러드가 연기한 이복오빠를 향해 새삼스런 감정을 깨달은 주인공이 독백한다. “옷도 촌스럽게 입고, 귀엽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서 빈둥대는 느림보잖아.” <앵커맨>부터 <포게팅 사라 마셜>까지 다섯편의 제작·연출작에 조연으로 러드를 캐스팅한 이 시대 최고의 익살꾼 주드 애파토우의 노림수가 눈에 선하다. 외모가 캐릭터인 ‘천생 루저’의 곁에는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짓은 싱거운 못난 친구’ 한명쯤 있어줘야 하는데, 그게 바로 러드다. 최고 별종 피비의 반려자 마이크 헤니건으로, <프렌즈>의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바보짓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일 역시 보기만큼 쉬운 건 아니다. 옆집의 편한 오빠(<클루리스>)에서, ‘누구 농담이 더 싱거운가’에 열을 올리는 옆집의 한심한 총각(<40살까지 못해본 남자>), 때때로 일탈을 꿈꾸는 옆집의 덜떨어진 유부남(<사고친 후에>)으로 자리잡은 러드의 캐릭터는 영화 밖에서도 다르지 않다. 최고의 짝패 세스 로건과 출연한 토크쇼에서 선보이는 온갖 지저분한 개그는 그중 압권. 그러나 이래봬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정식으로 연극을 배운 실력파에, <클루리스>의 대성공 이후 1년간은 연극 무대를 찾아다니며 할리우드를 멀리했을 정도다. 코미디 배우를 좋아하긴 했지만, 정확히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아니란다. “결함도 있고 이기적인, 그런 인물이 흥미롭다. <사고친 후에>는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부터 애파토우와 함께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기혼자에 아이가 있으니까. 아내와 함께 서로의 짜증나는 부분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큰 도움이 됐다. 아내는 아직도 그 리스트를 끝내지 못했지만. (웃음)” 지금이라도 동네 마트에 나가면 아이와 함께 손수레를 미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남자의 최고 장기는, 생활인의 눈부신 미소. 열번 실수를 통해 아주 사소한 한 가지를 가까스로 배우는 우리를 똑 닮은 그 모습을, 천만달러짜리 스타의 백만달러짜리 미소라고 대신할 수 있을까. 주연 따윈 맡지 말고, 평생 그렇게 시시껄렁하게 늙어주십사, 미안한 부탁을 대놓고 하고 싶어지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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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사고친 후에>의 폴 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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