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허영의 도시인 줄만 알았던 로스앤젤레스가 생전 처음 이름값하는 ‘천국’다워 보였다. 2004년 미국 <쇼타임>이 첫 방송한 레즈비언 드라마 <L워드>의 LA는, 레즈비언/바이섹슈얼 여성들이 폼나게 일하고 진짜배기 고민과 우정(걸핏하면 애정으로 변질돼 탈이지만)을 나누는 쾌청한 낙원이다. 한데 성 정체성만 빼면 각양각색인 그녀들은 어쩌다 패거리를 이루게 됐을까?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소우주 중앙에 태희(배두나)가 있다면, <L워드>의 태양은 양성애자 알리스(리샤 헤일리)다. 프리랜서 잡지 에디터 알리스는 친구 무리 중 늘 한명쯤 있게 마련인 중재자/관찰자/기록자다. 수레국화 모양 금발을 찰랑이는 그녀는 태양된 자답게 매번 재가 될 때까지 사랑하고 날이 새도록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지쳐 쓰러진 친구들의 어깨 위에 골고루 햇살을 뿌린다.
<L워드> 캐스트 중 유일하게 공식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인 리샤 헤일리에게 알리스는 좋은 배역 이상이다. 헤일리는 일찌감치 여성 듀오 ‘더 머머스’(Murmurs: 속삭임)를 결성해 90년대 대학가에서 사랑받았고, K. D. 랭의 파트너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불꽃머리 펑크 로커 모습 그대로 출연한 1997년 퀴어독립영화 <올 오버 미>(All over me)로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오히려 리샤 헤일리를 <L워드>의 세계에 초대하기 위해 작가들이 마련한 ‘옷’이 알리스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터다. 드라마의 성공으로 헤일리는 레즈비언 사이트 애프터앨렌닷컴이 뽑은 ‘섹시한 100인’ 투표에서 거성 안젤리나 졸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해버렸다. 자유로운 성장과정이 빚어낸 헤일리의 다정하면서도 똑똑한 품성은 그녀를 <L워드>에서 가장 많이 웃기고 울리는 배우로 만들었다. 그녀가 견과류를 오도독 씹는 듯한 말투로 던지는 농담의 타이밍은 절묘하고, 아이처럼 거리낌없이 토하는 슬픔의 무게는 둔중하다. 그녀는 실수는 할지언정 비겁함은 모르는 의젓한 쾌락주의자다. 나이를 초월한 다채로운 헤어스타일, 나풀대는 드레스부터 남성 정장까지 거뜬히 소화하는 유연한 스타일과 음악성(현재 헤일리는 여성 밴드 어허허(Uh Huh Her)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다)도 배우로서 그녀가 보유한 자산이다. ‘L워드’로 말장난을 치자면, 총명하고(luminous), 사랑스럽고(lovely), 생기 넘치는(lusty), 자유주의자(liberal). 유튜브에 떠 있는 <L워드> 출연진 일문일답의 한 대목을 보자. “어떤 동물이 되고 싶어?”라는 동료배우 에린 다니엘즈의 물음에 헤일리가 답한다. “음… 하늘을 나는 새.” 친구는 새삼스럽다는 듯 냉큼 대꾸한다. “넌 지금도 새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