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결혼이 연애 이상으로 달콤할지도 모른다. <고스트 앤 크라임>의 조 드부아, 제이크 웨버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시시하고도 위험한 망상에 빠져들게 된다. 식탁이 뒤집히도록 악을 쓰고 발을 구르는 세딸들의 난장판 속에서 아침을 챙기고, 머리를 빗겨주며, 하찮은 질문 하나 무시하지 않고 응답해주는 남자.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겐 “파티”라고 말하는 그에겐 늘어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조차 눈부시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속 터지는 우직함이나 비현실적인 선량함이 아닌, 딱 정확히 알맞은 온도의 사려 깊음. 1989년에 데뷔했으니 벌써 20년차의 배우인데, 제이크 웨버는 필모그래피의 길이에 비례하는 중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7월4일생>이나 <펠리칸 브리프>처럼 출연장면을 애써 색출해봐야 하는 조·단역이 대다수.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던 <U-571>의 중령은 실전에서는 뒷걸음질을 치는 남자였고, <조 블랙의 사랑>의 자신만만한 듯 보였던 사업가는 어설프게 계략을 꾸미다 수모를 당하며, <새벽의 저주>의 건실한 영업사원은 결정적 순간에 좀비에게 물어뜯겨 홀로 남는 처지가 된다. 치밀하게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도, 그렇다고 로맨틱한 판타지를 부풀리기에도 웨버는 어딘가 헐렁하고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터뷰 기사는 모래 더미에 흘린 바늘만큼이나 찾기 힘들고, IMDb 게시판은 왜 이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냐는 팬들의 성토와 보물을 발견한 집단의 은근한 자부심이 뒤엉켜 넘실댄다.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걸음 뒤. 하지만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영리하지 못한 그 속도 때문이다. 도드라져 빛나는 대신 한번 더 기다리고, 한번 더 망설이며, 한번 더 보듬기. 말하자면 제이크 웨버는 신호가 울리는 순간 쌩하고 달려나가기보다는 뒤에 서서 넘어지는 이가 없는지 살피는 사람이다. 영웅이라기보다는 전투가 남긴 잔해를 묵묵히 치우는 사람이다. <새벽의 저주>의 마이클은 피에 굶주린 좀비떼에 뒤쫓기는 와중에도 일행을 떠나보내며 “난 여기서 잠시 머무르며 일출이나 즐길게요”라고 말한다. <고스트 앤 크라임>의 조 드부아는 세파의 전장에서 멍들어 돌아온 아내를 향해 언제나 이렇게 묻는다. “괜찮아? 괜찮은 거지?” 그럴때면 언제나, 그의 구겨진 어깨를 안아주며 대답하고 싶어진다. 괜찮아, 당신이 거기에 그대로 있는 한.
씨네21
검색
<고스트 앤 크라임> <새벽의 저주>의 제이크 웨버
이어지는 기사
- 난 네게 반했어, <씨네21> 기자들의 완소 배우 12인 소개
- [로맹 뒤리] 프랑스 남자적 로망
- [리샤 헤일리]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자유주의자
- [가세 료] 미니멀리즘의 매력
- [폴 러드] 그냥 시시하게 늙어주세요
- [브래들리 휘트퍼드] 영원히 기억될 단 한번의 옷
- [알레산드로 니볼라] 미워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
- [조나 힐] 만사태평 나쁜 친구
- [마리나 골바하리] 떨리는 소녀의 공동
- [블레이크 라이블리] 사람 잡는 그 미소
- [임달화] 홍콩영화계 최고의 꽃중년
-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위대한 변태 늙은이
- [제이크 웨버] 딱 알맞은 온도의 사려깊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
최신기사
-
[coming soon] 1승
-
위기 속 해결사 찾는 CJ의 신규 인사 발표, 그룹 최초로 90년대생 CEO 선임, 콘서트영화 특수관 흥행시킨 방준식 4DPLEX 대표
-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희망의 건너편
-
[인터뷰] 배우의 역할은 국경 너머에도 있다 TCCF 포럼 참석한 네명의 대만 배우 - 에스더 리우, 커시 우, 가진동, JC 린
-
[인터뷰] ‘할리우드에는 더 많은 아시아계 프로듀서들이 필요하다’, TCCF 피칭워크숍 멘토로 대만 찾은 미야가와 에리코 <쇼군> 프로듀서
-
[기획] 대만 콘텐츠의 현주소, 아시아 영상산업의 허브로 거듭나는 TCCF - 김소미 기자의 TCCF,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 방문기
-
[비평] 춤추는 몸 뒤의 포옹, <아노라> 환상을 파는 대신 인간의 물성을 보여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