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슈퍼히어로 대백과사전] 슈퍼히어로 영화 베스트 50위~26위
2008-06-26
글 : 김도훈

<슈퍼맨>이 4편까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 보라색 타이츠를 입은 허허실실 슈퍼히어로 ‘팬텀’이나 오르가슴 레이저를 발사하는 히어로 ‘오르가즈모’는 들어보셨나. <씨네21>이 지금까지 만들어진 슈퍼히어로 영화를 한데 모아 베스트를 매겼다. 스판덱스가 가장 섹시한 순위는 아니다. 참고로 마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최종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그게 왜 슈퍼히어로 영화냐고? ‘슈퍼파워로 사람들을 돕지만 그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는데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 히어로’를 그린 작품이라면 당연히 슈퍼히어로 영화 아니겠는가.

50. <캣우먼>

최악의 악당상: 악당 샤론 스톤의 무기는 화장품 부작용으로 철판처럼 두꺼워진 피부다. 이거 혹시 농담?

<캣우먼>의 가장 큰 비극은 팀 버튼과 미셸 파이퍼의 <캣우먼>이 좌초됐다는 거다. 사실 그때 모든 게 끝났어야만 했다. 그러나 돈에 굶주린 제작자들은 코믹스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성 히어로를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았고, 결국 비극을 잉태했다. 감독 피토프(<비독>)의 연출과 할리 베리의 연기는 가관이다. 그래도 최악의 조합을 꼽으라면 역시 마이클 페리스(<터미네이터4>)의 유약한 각본과 <물랑루즈>의 앵거스 스트라티가 과도한 오트 쿠튀르 정신으로 만들어낸 캣우먼 커스튬이다. 바늘과 실을 든 <배트맨2>의 셀리나 카일을 돌려달라.

49. <캡틴 아메리카>

90년대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이 전설적인 괴작을 대여해본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마블의 인기 슈퍼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는 2차대전 중 독일의 악당 ‘레드 스컬’에 맞서 미국을 지킨다. 전쟁 뒤 정부에 의해 냉동보관되어 있던 캡틴은 레드 스컬이 미국 대통령을 납치하려는 1990년에 다시 깨어난다. 이 B급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제작비가 너무 없어서 화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다. 90년대의 마블사가 얼마나 쪼들렸으면 이런 제작진에 판권을 넘겼으랴. 둘째, 1990년의 미국 대통령은 조지 부시 1세다. 캡틴 아메리카만 없었다면 걸프전도 없었을 것을!

48. <슈퍼맨4: 최강의 적>

<슈퍼맨4: 최강의 적>은 <슈퍼맨> 프랜차이즈의 열성팬들에게는 잊어버리고픈 ‘최강의 적’이다. 이야기도 웃긴다. 죽지도 않고 다시 돌아온 렉스 루터는 박물관에 진열된 슈퍼맨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악당 ‘뉴클리어맨’을 창조한다. 뉴클리어맨이 태양열을 에너지로 만들어서 막강한 위력을 휘두르자 슈퍼맨은 발만 동동 구른다. 그래서 어떻게 처단하냐고? 태양열로 가는 시계를 멈추는 방법이 뭐겠나. 태양만 가리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슈퍼맨4…>의 특수효과는 시리즈 중 최악이다. 제작진으로서도 변명할 거리는 있다. 3600만달러로 책정된 제작비가 촬영 직전에 1700만달러로 줄어버렸으니 그들로서도 도리가 없었을 게다.

47. <스틸>

1997년은 NBA의 전성기였다. 전성기의 NBA 스타들이 잘하는 뻘짓. 바로 영화 출연이다. 마이클 조던은 눈뜨고 봐줄 만한 <스페이스 잼>(1996)을 찍었다. 데니스 로드먼은 놀랍게도 서극의 할리우드 진출작 <더블 팀>(1997)에 출연했다. NBA 선수들의 영화 출연이 유행이니 랩 앨범도 냈던 샤킬 오닐 역시 분발해야만 했고, 놀랍게도 그는 슈퍼히어로가 되는 편을 택했다. DC 만화가 원작인 <스틸>은 로우-파이 <아이언맨>이라 할 만하다. 군수무기 디자이너인 존(샤킬 오닐)은 적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는 무기를 제작한다. 군부가 이를 거절하자 화가 난 존은 회사를 뛰쳐나오고, 살인을 일삼는 갱단을 제압하기 위해 쓰레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갑옷전사 ‘스틸’로 만든다. <아이언맨>도 나왔으니 이젠 샤킬 오닐의 과오도 잊어줄 때다.

46. <바브 와이어>

슈퍼히어로 노출상 2위: 뭐? 그렇다면 1위가 대체 누구냐고? 이 리스트의 8위를 보시라.

서기 2017년. 세계는 의회군과 반군의 전쟁으로 난리통이고 두 진영 사이에는 중립구역 스틸하버가 존재한다. 그곳에서 술집 해머헤드를 경영하는 바브 와이어는 밤거리를 오토바이로 달리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사실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크호스사의 SF 히어로 만화를 영화화한 <바브 와이어>는 당시 <SOS 해상기동대>(Bay Watch)로 인기절정이던 파멜라 앤더슨의 가슴을 이용해 남성 관객 좀 끌어보려는 B급영화다. 하지만 가슴 말고도 은근히 볼 만한 부분은 있다.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장 필립 카프가 디자인한 술집 해머헤드의 디자인과 그해 ‘MTV 최고의 격투상’을 받은 액션장면들은 의외로 썩 괜찮다.

45. <고스트 라이더>

변신 뒤만 보고 싶은 히어로상: 두터운 메이크업과 가발을 뒤집어쓴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얼른 ‘고스트 라이더’로 변신해주기만 바라게 될 뿐.

(요즘은 경계가 거의 없어졌지만) DC의 히어로들과는 달리 마블 히어로들은 자신 속의 어둠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로 고통받는 존재들이었다. 스턴트맨 자니 블레이즈가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을 판 뒤 겪는 도덕적 갈등을 다루는 원작 <고스트 라이더>는 마블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걸작이었다. 그러나 4500만부가 팔린 원작을 영화화하면서도 <고스트 라이더>의 제작진은 별로 야심이 없는 듯하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마블이 왜 제작에 직접 뛰어들었는지 이해가 간다.

44. <배트맨과 로빈>

최고의 ‘게이 아이콘’상: 배트맨과 로빈의 의상에 젖꼭지를 단 건 천재적인 아이디어다. 덕분에 배트맨과 로빈은 게이 아이콘으로서의 불멸의 명성을 되살렸다.

<배트맨과 로빈>의 개봉 전에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조엘 슈마허가 <배트맨 포에버>라는 재앙을 발판 삼아 조금이나마 더 볼품있는 오락영화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슈마허는 팬들의 염원을 깡그리 무시하고 진짜 재앙을 만들어냈다. 악역인 미스터 프리즈(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포이즌 아이비(우마 서먼)는 거의 농담에 가까울 만큼 카리스마가 없고, 쓸모없는 배트걸(알리시아 실버스톤)이 덧붙으면서 이야기는 프로덕션디자인만큼이나 난잡스러워진다. <배트맨> 시리즈의 최고 악당은 역시 조엘 슈마허다.

43. <슈퍼걸>

‘슈퍼걸’은 이미 1959년에 DC 코믹스를 통해 데뷔한 소녀다. <슈퍼맨> 시리즈의 흥행 덕을 보겠다고 제작자들이 제멋대로 창조한 아류 캐릭터는 아니라는 말이다. 물의 행성으로부터 온 소녀 카라는 행성 사람들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신비의 광석을 지구로 날려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더 큰 문제는 광석이 세계지배를 노리는 악녀 셀레나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카라는 슈퍼걸이 되어 셀레나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80년 <주말의 명화>에서 끊임없이 재방영해주던 <슈퍼걸>은 10대 이하 관객의 구미에 딱 맞도록 설계된 영화다. 딱 그만큼의 캠피한 재미를 원한다면 낄낄 웃어넘길 만하다. 다만 그 나이에 여자 말론 브랜도 행세를 해보겠다고 악역을 맡은 페이 더너웨이의 연기는 좀 슬프다.

42. <팬텀>

가장 허약한 슈퍼히어로상: 팬텀의 무기는 총밖에 없다. 게다가 악당을 뒤쫓을 땐 택시를 잡아탄다. 히어로 맞아?

클래식 코믹스를 가장 재미있게 영화화하는 방식은 <딕 트레이시>나 <인간 로켓티어>처럼 원작이 발간된 시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는 거다. 리 포크의 30년대 코믹스를 영화화한 <팬텀>도 마찬가지다. 가진 건 총밖에 없는 남자가 보라색 전신 타이츠를 입고 악당과 싸우고(그만큼 또 얻어터지고) 여자도 구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저 배시시 웃음만 난다. <타이타닉>의 악당 빌리 제인이 팬텀으로 나오고, 무명 시절의 캐서린 제타 존스가 악당 똘마니로 나온다. 웃자고 만든 영화임은 틀림없다.

41.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

클라크가 보통 연인들처럼 루이스 레인과 사랑할 수 없는 것, 피터 파커와 MJ의 사이가 언제나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다 남들보다 잘난 탓에 제대로 된 성생활 한번 못해보고 사춘기 소년처럼 영원히 살아가는 슈퍼히어로들의 비극이다.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의 매트는 여자친구 제니가 슈퍼우먼 ‘G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제는 제니의 성격이 히어로에 걸맞지 않게 집착적이고 예민하다는 거다. 이별통보를 했더니 제니는 모든 슈퍼파워를 동원해 매트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간다. 히어로물의 관습을 슬쩍 비튼 약간 시시껄렁한 로맨틱코미디.

40. <배트맨 포에버>

이 영화의 제목만 말해도 부들부들 분노로 떨다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배트맨> 팬들이 세상에 어디 한두명이랴. 조엘 슈마허는 팀 버튼이 근사하게 창조한 정신분열증적 히어로를 완벽한 싸구려 오락영화의 광대로 변신시켰다. 안톤 푸스트와 보 웰치의 뒤를 이은 바버라 윙은 고담시를 색맹들을 위한 놀이동산으로 만들었고, 발 킬머, 토미 리 존스, 짐 캐리의 연기도 종이인형처럼 깊이가 없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며 그나마 <배트맨과 로빈>보다는 낫지 않냐고? 뭐든 먼저 시작한 놈이 더 얻어맞게 마련이다.

39. <스폰>

스폰은 지옥에서 온 히어로다. 정부 비밀조직의 킬러 알 시먼즈는 북한의 생화학 무기공장으로 잠입해들어갔다가 상관 윈에게 살해당한다. 그로부터 5년 뒤, 시먼즈는 ‘아내를 만나게 해주는 대신 지옥의 군대를 이끈다는 조건’으로 악마와 계약을 한 뒤 ‘스폰’이라는 히어로가 되어 지상으로 귀환한다. 90년대 코믹스계의 황태자는 토드 맥팔레인이었다. 요즘은 액션피겨를 생산하는 맥팔레인사의 대표로 더 유명하긴 하지만, 그가 창조한 스폰은 전세계에서 1억권 이상을 팔아치울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악마와의 계약으로 히어로가 된 ‘스폰’이 그런지 음악이 징글거리던 당대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팬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한다. MTV 스타일의 특수효과는 지나치게 난삽한데다가 플롯은 원작의 배배 꼬인 매력을 소년영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데 사력을 다한다. 사운드트랙은 꽤 들을 만하다. 그러고보면 90년대는 사운드트랙만 1급인 2급영화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 시절이 지나서 정말 다행이다.

38. <저지 드레드>

최고의 코스튬상: 표정연기 안 되는 스탤론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덮어주는 헬멧이라니. 감사할 따름이다.

서기 2139년의 지구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유일하게 남은 뉴욕이 끔찍한 무정부상태를 면하고 사는 건 그나마 ‘저지(판사)’라 불리는 집단이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덕이다. 저지들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보이던 저지 드레드는 살인누명을 쓰고 도시에서 추방되고, 누명을 벗기 위해 다시 뉴욕으로 숨어들어온다. 영국의 컬트 코믹스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저지 드레드>는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영국의 신성 대니 캐넌이 이 괴이할 정도로 전체주의적인 원작을 가지고 무슨 마법을 부릴지도 큰 관심사였다. 제작비도 1억달러나 투여됐다. 덕분에 특수효과는 당대 최고 수준이고 지금도 즐길 만하다. 그러나 벌어들인 돈은 겨우 3천만달러. 대니 캐넌은 이후 영화를 만들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고 스탤론의 시대는 결국 막을 내렸다. 할리우드도 마침내 깨달았을 것이다. 고집 센 스타와 고집 센 신인감독에게 1억달러를 쥐어주는 건 자살행위라는 것을.

37. <슈퍼맨3>

<슈퍼맨> 시리즈의 몰락을 선언한 야심적 졸작. 대기업 총수인 로스는 컴퓨터 기술자 거스를 고용해 기상위성을 마음대로 조작하도록 만든다. 콜롬비아에 태풍을 불러일으켜 커피농사를 망친 뒤 세계 커피 산업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그들의 음모는 슈퍼맨에 의해 좌절된다. 분노한 로스는 슈퍼맨을 죽일 수 있는 특수물질을 만들어 슈퍼맨에게 선물로 주지만 슈퍼맨은 죽지 않고 도리어 악당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80년대 히어로 영화에서 <스파이더맨 3> 같은 히어로의 내적 갈등을 기대하는 건 곤란하다. 올드팬들의 기억에 선명한 ‘피사의 사탑 다시 세우기’ 장면이나 슈퍼컴퓨터와 싸우는 클라이맥스의 대결은 어째 좀 기묘한 매력이 있다.

36. <블레이드3>

데이비드 S. 고이어는 훌륭한 각본가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 시티>는 SF 장르문학의 관습들을 영리하게 짜맞춘 모자이크였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블레이드2>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블록버스터의 구조와 장르적 매력을 잘 짜깁기해내는 데이비드 S. 고이어의 장기가 발현된 작품들이다. 문제는 이거다. 각본가라는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감독이 되지 못한다는 할리우드 불변의 진리. 그럼에도 각본가들은 영원히 감독의 꿈을 꾼다는 할리우드의 비극적 진리.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직접 메가폰을 쥔 <블레이드3>에서 유일하게 볼 만한 건 제시카 비엘의 매끈한 몸매뿐이다. 야심이 너무 컸다, 데이비드.

35. <일렉트라>

<데어데블>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스핀오프로 만들 만한 근사한 조연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로서야 ‘불스아이’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더 보고 싶지만, 제니퍼 가너의 <일렉트라>를 선택한 제작사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렉트라>에는 <데어데블>의 일렉트라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가벼운 스핀오프 속의 일렉트라는 동양계 악당들에 맞서서 싸우는 동양계 무공 히어로. <X파일> 시리즈의 롭 바우먼은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보다는 타란티노의 <킬 빌>로부터 더 큰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34. <스카이 하이>

한마디로 말하면 ‘슈퍼히어로물+미국 고등학교 너드(Nerd) 이야기’. 슈퍼히어로의 외동아들 윌은 슈퍼히어로를 육성하는 고등학교 ‘스카이 하이’에 입학한다. 문제는 윌이 부모의 재능을 선천적으로 물려받지 못했다는 거다. 그는 부모의 기대에도 ‘히어로반’이 아니라 ‘히어로 조수반’에 배치되고, 수많은 왕따의 역경을 헤쳐나간 뒤에야 슈퍼파워를 찾게 된다. <스카이 하이>에는 미국 청춘영화 장르의 관습과 슈퍼히어로 영화의 관습이 아주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다. 영리하고 기분좋은 코미디영화.

33. <젠틀맨 리그>

가장 황망한 히어로상: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가 슈퍼히어로로 거듭났다. 다음은 누구냐. 기차를 운전하며 얼음폭풍을 무기로 휘두르는 여전사 안나 카레리나?

<와치맨>과 <300>의 앨런 무어가 <젠틀맨 리그>의 원작을 그리면서 얼마나 키득거렸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불사신 도리안 그레이,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네모 선장, 이중인격을 지닌 과학자 지킬 박사, 모험가 쿼터메인이 히어로 조직을 만들어서 악당에 맞서는 이야기라니. 게다가 미국 스파이의 이름은 톰 소여고 그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건 영국 정보부 M이다. <블레이드>의 스티브 노링턴은 말도 안 될 것 같은 조합을 고풍스러운 프로덕션디자인을 무기로 꽤 근사하게 그려낸다. 물에 술 탄 듯 밍밍하긴 하지만 순진한 구식 모험담의 여유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다시 DVD를 꺼내들 만하다.

32. <판타스틱4>

<스파이더 맨>의 원작자 스탠 리가 “슈퍼히어로도 팀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창조한 <판타스틱4>의 원작은 <엑스맨>과 함께 마블 코믹스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팀워크 히어로물’ 중 하나다. 하지만 영화화에 있어서라면 두 시리즈는 전혀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브라이언 싱어를 영입해 좀더 현대적인 히어로물의 업그레이드를 표방하면서 스판덱스 코스튬을 버린 마블이 <판타스틱4>에서는 파란색 스판덱스를 그대로 살려낸 것이다.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원작의 알록달록하고 가벼운 여흥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의미다. 태생이 이러하니 <판타스틱4>는 그저 오락영화로서의 재미에만 온전히 집중한다. 그래도 네명의 히어로가 각자의 능력을 이용해 절묘한 팀워크를 이루는 걸 보고 있노라면 꼭 현대적 히어로물이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려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1. <슈퍼히어로 끄리쉬>

그저 입이 딱 벌어지는 발리우드산 슈퍼히어로 영화. 크리쉬나는 슈퍼파워를 간직한 소년이지만 인도의 산골마을에 처박혀 살고 있다. 하지만 히어로는 도시로 나가야 하는 법. 크리쉬나는 여행 온 싱가포르 여인 프리야와 사랑에 빠져 싱가포르로 향하고, 슈퍼히어로 ‘끄리쉬’로 변신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다. <슈퍼히어로 끄리쉬>는 발리우드영화의 발전상을 잘 보여준다. 할리우드 히어로 장르의 관습은 능수능란하게 변주되어 극에 녹아들고 특수효과도 꽤 수준이 높다. 다만 발리우드영화답게 정신없이 화려한 율동과 노래가 끝없이 이어지며 러닝타임도 3시간을 향해 달린다. 물론 그거야말로 인도 풍미의 향신료 아니겠는가.

30. <크로우>

<크로우>는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로 걸작인가. 글쎄, 알렉스 프로야스는 어두운 상상계를 비주얼화하는 데는 능한 감독이지만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그러나 <크로우>를 성전에 올려놓은 열혈팬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 <크로우>를 브랜든 리의 초현실적으로 비극적인 죽음과 따로 떼어놓고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약혼자와 살해당한 록 기타리스트가 살아돌아와 복수극을 벌인다는 내용의 <크로우>는 브랜든 리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다. 리는 촬영 중 일어난 총기 오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브루스 리 가문의 저주라고 수군거렸다. 어쨌거나 영화는 완성되어야만 했다. 미라맥스는 브랜든 리를 디지털로 만드는 데 1천만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브랜든 리는 여전히 무명의 2등급 스타였을 따름이다. 당연히 영화는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그러나 전설로 남았다.

29. <퍼니셔>

가장 코스프레하기 쉬운 히어로상: 해골 그려진 검은 티셔츠에 검은색 데님이면 당신도 퍼니셔.

퍼니셔는 코믹스판 <복수는 나의 것>이다. FBI 요원 프랭크는 총기밀매 소탕작전 중 거부 하워드의 아들을 죽게 한다. 분노한 하워드는 프랭크의 가족을 처참하게 몰살하고, 겨우 살아난 프랭크는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퍼니셔(응징자)가 된다. 마블 코믹스의 가장 인기있는 히어로 중 하나이지만 퍼니셔에게 별다른 슈퍼파워는 없다. 몸에 붙는 스판덱스 대신 트레이드 마크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닐 따름이다. 가장 인간적인 히어로라고나 할까. <퍼니셔>가 국내 개봉했을 때 눈여겨본 사람은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중급 액션활극 정도로 취급됐을 뿐이다. 하지만 기이하게 엇나가는 유머감각도 발군이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이 프랭크와 대안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참, <퍼니셔>는 이미 1990년에 돌프 룬드그렌 주연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그냥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게 속 편한 영화다.

28. <인간 로켓티어>

가장 불쌍한 악당 배우상: 아무리 제임스 본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찌질하게 죽는 나치 악당이라니. 티모시 달튼은 이 영화로 커리어의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데이브 스티븐스의 동명 코믹스를 영화화한 <인간 로켓티어>는 말 그대로 로켓을 달고 날아다니는 남자 이야기다. 1938년의 LA. 경비행기 조종사인 클리프는 FBI와 나치의 공중 추격전에 말려들어 추락한 뒤 하워드 휴스가 개발한 최신예 개인용 로켓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FBI와 나치의 추격을 동시에 받기 시작한다. 배경이 40년대 미국의 ‘좋은 시절’인 <인간 로켓티어>는 딱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슈퍼히어로물답다. 바로 그게 약점이다. <인간 로켓티어>의 발진을 가로막는 건 낙관적인 PG급 이야기의 느슨함이니까. 하지만 코스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멋지다. 이베이에서 수백달러짜리 로켓티어 액션피겨를 발견하고 침 삼켜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게다.

27. <오르가즈모>

최고의 슈퍼파워상: 오르가슴을 느끼게 만드는 게 오르가즈모의 슈퍼파워다. 이런 파워만 있다면야 매일매일 스스로를 응징하고 싶겠다.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부터 한번 들어보시라. 조 영은 모르몬교 청년이다. 선교를 하러 어느 집을 방문했더니 집주인인 포르노 감독이 촬영에 방해된다며 스탭에게 조의 그곳을 잘라버리라 한다. 알고보니 가라테 유단자였던 조는 스탭을 때려눕히고, 감동한 감독은 조를 주연으로 영화를 만들려 한다. 영화의 내용은 오르가즈모라는 슈퍼히어로가 악을 응징한다는 것. 오르가즈모의 슈퍼파워는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 오르가즈모레이터다. 그런데 알고보니 오르가즈모레이터는 실존하는 기계였고(어쩌고저쩌고…). <사우스 파크>의 트레이 파커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오르가즈모>는 전통적인 슈퍼히어로에 대한 풍자처럼 보이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엉성한 저예산 싸구려 코미디다. 그런 영화가 27위까지 할 까닭이 어디 있냐고? 이 순위는 엄마 몰래 <오르가즈모> 비디오를 빌려서 친구들과 돌려보던 90년대 영화광들에게 바친다.

26. <블레이드>

절반은 인간, 절반은 뱀파이어인 블레이드가 뱀파이어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로스트와 대결한다. 이렇게 진부한 컨셉 하나로 시작한 <블레이드>는 9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 ‘테크노 뱀파이어 장르’라고 불릴 장르 하나를 개발했다. 일렉트로니카 음악과 가죽 페티시를 스타일화한 이듬해의 <매트릭스> 역시 어느 정도는 <블레이드>를 참고했을 게다. 하지만 <블레이드>는 날씬한 스타일에 비해 이야기도 캐릭터도 지나치게 멋이 없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걸작 <블레이드2>를 잉태하기 위한 첫 스텝이라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