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슈퍼히어로 대백과사전] 슈퍼히어로 영화 속 빛나는 악당 베스트 10
2008-06-26
글 : 장영엽 (편집장)

영웅이 되는 건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적이 있으면 맞서 싸우고, 고난이 닥치면 이겨내고, 뭘 해야 할지 모를 땐 대중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된다. 그런데, 악당은? 웬만한 계략은 현명한 영웅에게 씨알도 안 먹힌다. 종종 생사를 걱정할 정도의 메가톤급 시련을 겪는다. 사람들의 욕설과 비난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릴 강철 심장도 필요하다. 악당이 매력적인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겪으며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왔으니까. 그동안의 슈퍼히어로 영화는 영웅에겐 관대하고, 악당에겐 가혹했던 면이 있다. 영웅의 위대함을 조명하느라 악당의 팔색조 매력까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준비했다. <씨네21>이 고르고 골라 선택한 역대 최고의 악당들이 여기 있다.

1. <배트맨>의 조커

1989년, 처음으로 제작된 배트맨 영화의 주인공은 두명이었다. 배트맨, 그리고 조커. 이 영화에서 영웅 배트맨은 예민하고 불안했으며, 악당 조커는 화려하고 기세등등했다. 에메랄드빛 머리와 붉은 입술, 늘 웃는 표정에 보랏빛 슈트를 즐겨 입던 조커는 계획한 모든 범죄를 진두지휘한다. 그 모습이 마치 오케스트라를 총지휘하는 마에스트로 같다. 조커가 명지휘자라면, 그의 음악은 전위에 가깝다. 희생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조커의 범죄는 언제나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희생자가 조커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죽어가도록 하는 ‘웃음 가스’, 꽃 모양의 브로치에서 발사되는 치명적인 화학약품 등이 그 증거다. 실제로 조커는 자신을 범죄자가 아닌 예술가라 여겼다. <배트맨>(1989)에서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애인을 떠나는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예술하러 가.” 영화 역사상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악당은 없었다. 앞으로도 나타나기 힘들 것이다.

2. <스몰빌> <슈퍼맨> <수퍼맨 리턴즈>의 렉스 루터

슈퍼맨의 유년 시절을 다룬 미국 드라마 <스몰빌>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유난히 악당 렉스 루터를 지지하는 글이 많다. 루터를 맡은 배우 마이클 로젠바움의 연기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악한 부친 라이오넬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위선자로 낙인찍힌 경험, 믿었던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한 아픈 기억이 렉스 루터를 악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건 꽤 설득력있다. <스몰빌>이 이처럼 루터에게 동정표를 던질 때, <슈퍼맨>과 <수퍼맨 리턴즈>는 악당으로서 그의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슈퍼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그가 크립토나이트에 약하다는 사실을 밝혀낸 루터의 지적 능력은 인정할 만하다. <슈퍼맨> 시리즈 다섯편을 거치는 동안 오직 ‘토지 확보’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세상 이치에도 밝다. 게다가 그 정도 재력이면 혼자서 행복하게 살 법도 한데 지속적으로 슈퍼맨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끈기도 있다. 결론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그만큼 완벽한 악당은 드물다는 것.

3. <배트맨2>의 펭귄맨

펭귄맨은 팀 버튼이 제작한 두편의 배트맨 영화를 통틀어 가장 팀 버튼적인 캐릭터다. 그 말은 곧 이 악당이 기괴한 외면에 상처투성이 내면을 가졌다는 뜻. 펭귄의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려진 펭귄맨은 하수구에서 펭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세상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배트맨2>에서 배트맨의 주된 임무는 이러한 펭귄맨의 계획을 막아 사회의 안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팀 버튼은 영웅의 임무와 전혀 관계없는 펭귄맨의 개인적 에피소드를 자꾸만 늘어놓는다. 펭귄맨은 부모를 찾기 위해 신상기록 서류를 뒤지고, 시장이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백만장자 맥스의 허무맹랑한 말을 너무 쉽게 믿는다. 그의 포악한 행동 사이로 이와 같은 순수함이 엿보일 때, 펭귄맨을 선과 악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무산된다. 악당도 다르게 생각하면 사랑없이 외롭게 자란 어른 아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펭귄맨은 미움과 증오의 맑고 순수한 면을 보여주는 증거다.

4. <엑스맨> 시리즈의 마그네토

마그네토는 개인적 분노를 참지 못해 쉽게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는 삼류 악당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 수용소였다. 유대인 차별 정책으로 가족과의 생이별을 경험해야 했던 마그네토의 일생 동안 개인적이고 사소한 고민이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돌연변이 격리 정책에 맞서는 그의 태도는 그래서 더욱 진지하고 결연하다. 마그네토처럼 대의명분이 확실한 악당만큼 영웅을 괴롭게 하는 이는 없다. 혹은 마그네토를 악당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흑인 차별 정책에 대해 폭력적인 노선을 추구한 말콤 X가 악당이 아니듯 말이다. 인간 친화적인 엑스맨들이 마그네토에 맞서 싸우면서도 그에게 예우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코믹스치고 이렇게 예의바른 작품이 있나 싶을 정도다.

5. <배트맨2>의 캣우먼

뉴욕의 허름한 뒷골목, 금발 미녀에게 괴한이 다가간다. 부들부들 떨며 마초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던 그녀를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구해주었다. 하지만 안도의 순간도 잠시, 캣우먼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여자를 응징한다. 죄목은 하나다. 자기 몸 하나 챙기지 못하는 무력함. 이러한 ‘예측 불가능’이야말로 캣우먼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녀는 위와 같이 고담시의 악당을 처단하는 영웅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선한 이들 앞에서도 마음을 놓는 법이 없다. 상대가 방심할 때마다 여지없이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는 악당이 바로 캣우먼이다. 이는 그녀가 상사의 배신이라는 태생적 트라우마를 지닌 까닭이기도 하다. <배트맨2>를 통해 전개되는 배트맨과 캣우먼의 달콤하면서도 살벌한 로맨스는 쉽지 않기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아니, 그걸 로맨스라 부를 수는 있는 건지 모르겠다. 캣우먼은 한번도 그걸 사랑이라 부른 적이 없으니까.

6. <스파이더 맨> <스파이더맨 3>의 그린 고블린

스파이더 맨의 영원한 맞수, 그린 고블린은 현대 과학기술과 풍부한 자본이 창조해낸 인조 살인기계다. 이는 악당의 매력 또한 볼거리에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광택나는 녹색 갑옷과 잘빠진 박쥐 모양의 라이더를 보고 있으면 손에서 거미 실이나 뽑아내는 스파이더 맨이 영 시시해 보인다. 그뿐인가. 호박 모양의 아름다운 폭탄과 상대방을 끝까지 쫓아가는 유도 미사일은 스파이더 맨과의 결투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뉴고블린’에 등극한 해리는 아버지보다 열배는 잘생긴 비주얼과 검은색으로 업그레이드된 전투복을 과시하며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장비로도 고블린 부자가 스파이더 맨을 이기지 못한다는 설정이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7. <히어로즈>의 사일러

악당이 슈퍼히어로와 싸우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어서다.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의 사일러가 무서운 건 그의 목적이 영웅 그 자체라는 점이다. 비범한 줄 알았던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한 사일러는 영웅의 뇌구조를 읽어내 그들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머리뚜껑을 열고 뇌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한데, 그 대상이 자기일 수도 있으니 영웅으로서는 이보다 더 오싹할 수가 없다. 세계정복 따위의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코믹스의 악당과는 달리 구체적인 대상을 설정해놓고 하나씩 죽여나가는 사일러는 절대악에 가깝다. 오래 살고 싶은 슈퍼히어로라면 제일 먼저 피해야 할 블랙리스트 1순위 악당이다.

8. <언브레이커블>의 일라이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악당. <언브레이커블>의 일라이저만이 사용 가능한 수식어다. 그는 살아온 날의 3분의 1을 병원에서 누워 지냈으며, 평생 54번의 골절상을 입은 선천적 결핍증 환자다. 강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는 상상의 영웅을 찾고, 태어나서 한번도 다쳐본 적 없는 현실 속 데이비드는 곧 일라이저의 우상이 된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영웅을 우상으로 여기는 악당의 등장은 슈퍼히어로 영화 사상 <언브레이커블>이 최초일 것이다. 자기 같은 약자를 보호해달라며 방황하던 영웅을 인도하는 악당도 일라이저가 유일하지 않을까(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엘리야와 이름이 같다). 그는 슈퍼히어로를 발견하기 위해 열차 전복 사고와 호텔 방화 사건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지만 이것마저 일라이저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능가하진 못한다. 자신의 ‘한정판 갤러리’(limited edition)를 찾은 관객에게 고전 만화를 신나게 설명하던 그의 모습은 초췌하고 우유부단했던 영웅보다 훨씬 오래 기억될 것이다.

9. <데어데블>의 불스 아이

불스 아이는 뉴욕의 범죄왕 킹핀이 고용한 전문 킬러다. 그런데 그는 킹핀의 사무실에 들어오기 위해 경호원까지 잔인하게 죽인다. 킹핀이 이유를 묻자 불스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죽일 필요가 있었냐고? 그냥 죽인 거야.” 독침과 부메랑만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그는 무차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너무 시끄러운 할머니든 시비를 걸어오는 술집 남자든 누구든지 불스 아이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이런 ‘무데뽀 정신’이 바로 그의 매력이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달려드는 무모함이 결국 파멸을 자초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성질부터 내고 보는 무데뽀 악당이란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다. 불스 아이 역을 맡은 콜린 파렐이 예상 외로 그 역할에 잘 어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10.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 스탠 리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탠 리라면 스파이더 맨, 아이언맨, 헐크와 엑스맨을 창조한 명실상부한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코믹스 작가만큼 영웅을 지지고 볶는 사람도 없다. 슈퍼히어로가 어떤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실력을 발휘할지 생각하는 동시에 어떤 시련과 고통을 줄 것인지도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코믹스 작가니까. 게다가 스탠 리는 영웅에게 새로운 형식의 고민거리를 제공했다. DC 코믹스의 캐릭터가 ‘오직 악당’만 처리하면 만사 오케이였던 슈퍼영웅이라면, 스탠 리의 히어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하는 햄릿형 인물이다. 이런 실존적 고민을 던져놓고 자기는 한가로이 슈퍼히어로 영화(<스파이더맨 3>)에 찬조 출연해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네” 따위의 격려나 늘어놓다니. 그는 진정 악당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