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막식이 있던 날 오후 칸영화제의 전 집행위원장 질 자콥은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회의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트위터에 올린 다음 거기에 수수께끼 같은 말을 달아가며 심사 과정을 생중계했다. 심사위원장 난니 모레티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민하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결국에는 “빛이여 있으라!” 하고 질 자콥이 멘션을 날리자 그걸 본 사람들이 “이거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라틴어인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Light After Darkness’가 된다)가 수상하는 걸 암시하는 말 아니냐”며 다들 웃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수상은 사실이 됐다. 수상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도록 전임 집행위원장까지 전면에 나서 다각도로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마침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황금종려상의 주인으로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발표되었을 때 대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럴 만하다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였다.
수상작들에 의문을 제기함
하네케는 주제를 정하면 방식도 극단적으로 실천해야만 선택한 그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다고 믿는 감독이다. <아무르>에서는 일차적으로 노년의 사랑과 죽음이 주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극단적 방식이 취해졌을까. 몇편의 전작들에서 하네케가 게임과 쇼크라는 극단성으로 폭력의 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라면 <아무르>에서는 그 아무것도 장치하지 않고 그저 좁은 실내에서 움직이는 느릿하고 힘없는 노년의 배우의 몸짓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극단성을 취한다. 무언가를 결코 하지 않으려는, 하지 못하는 극단성. 카메라는 결코 집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이 든 아내가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을 잃어 병상에 눕자 나이 든 남편은 줄곧 집 안을 서성거리거나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거나 할 뿐, 힘겨운 간병을 지속한다. 가끔씩 찾아오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딸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남편의 눈에는 건강했을 때의 아내의 모습이 종종 상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도 잠시 뒤면 사라지고 만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모두 지난 다음 하네케는 이 남편에게 예의 하네케식 선택을 하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결정적 선택보다도 그에 이르기까지의 숨 막힐 정도로 느리고 힘겨운 묘사들이 훨씬 더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하네케 영화의 의심스럽고 위험한 영화 방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의 새로운 정조가 그 극단의 방식으로 전해진다는 점에서 <아무르>는 확실히 관심을 받을 만하다. 12월에 국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때 또 <아무르>에 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올해의 수상작에 관해서라면 그다음부터가 촌극이다. 심사위원 대상은 마테오 가로네의 <리얼리티>, 감독상은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심사위원상은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가 받았다. 경쟁작 중 가장 무난한 작품과 가장 이해되지 않는 작품과 가장 대중적으로 유쾌한 작품 하나씩에 상을 나눠준 식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수상이다.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의 영화언어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은 심사위원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이나 다른 영화에 비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연출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에 빠져들지 못했다”며 심사 과정에서 벌어졌을 논쟁을 시사했다. 프랑스 문화지 <인록>은 이 영화에 관해 “두 시간 동안의 헛소리”라고 무시했고 <르몽드>는 “이 영화를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합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노력해볼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우린 이 영화의 형식적 실험이 강렬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실험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난니 모레티는 영화제가 개막할 때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영화”에 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한 모양새가 됐다. 지난해에 이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자기가 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며 상을 주는 이상한 전통을 두해째 이어가고 있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가 올해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된 것이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를 기억하라
수상 결과에 관하여 우리만 의아해한 건 아닌 것 같다. 프랑스 현지 매체의 반응도 격렬하다. <텔레라마>는 “(황금종려상을 제외하고) 그외의 수상작 리스트는 완전한 난센스”라고 썼고, <리베라시옹>은 “황금종려상이 구원한 칸”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다음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등 경쟁부문의 몇몇 훌륭한 작품들을 은폐하는 바람에 심사위원장 모레티의 이미지는 손상을 입게 되었다”고 질타했다. <인록> 역시 “모레티는 결국 미학적이며 주제적인 측면에서 동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크로넨버그와 카락스를 무시했고 자기의 연출 실력을 과장하지 않는 홍상수와 키아로스타미의 섬세한 작품들도 무시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들에 너무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제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수상작과 그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지만 실은 영화제에서의 상이란 단지 심사위원 몇몇의 결정일 뿐 그 영화들에 관한 어느 온전한 증명도 되지 못한다. 혹은 공감과 격려의 목록은 누구에게나 따로 있게 마련이다. 단지 여기가 칸이기 때문에 늘 시끄러운 것일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올해 심사위원들이 선택한 영화들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제 중반 이후 찾아온 우리의 흥미로운 영화 목록을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가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영미권 영화부터 말해보자. 그가 특히 이번 경쟁부문 선정 과정에서 영미권 영화에 자기의 안목이 많이 반영되었음을 과시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칸영화제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영화들은 역시 자국영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영미권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칸의 신예 제프 니콜스가 만든 <머드>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이야기와 로브 라이너의 <스탠 바이 미>를 참조한 것 같은 영화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그 점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아칸소 지역의 숲속에 살고 있는 두 소년은 옆 무인도에 놀러갔다가 숨어 사는 범죄자를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와 친밀해지고 그의 부탁까지 들어주는 사이가 되면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제프 니콜스는 한편으로는 범죄영화를 또 한편으로는 성장영화를 만들어간다. <테이크 셸터>로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오른 제프 니콜스는 무언가 느슨하게 오래 극을 진행하다가 한방에 사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실력을 지녔다. 다소 성긴 구성과 진부한 결말과 처지는 리듬이 큰 단점으로 보이지만 제프 니콜스의 실력은 아직 한번쯤 더 기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앤드루 도미닉은 뛰어난 수작 <킬링 뎀 소프틀리>로 완벽하게 자기 실력을 입증했다.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대중적 성향의 영미권 라인업 중 가장 뛰어나다. 이른바 얼간이 같은 범죄자 녀석 둘이 모여 어쩔 수 없이 더 얼간이 같은 녀석 하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때 어디선가 해결자(브래드 피트)가 나타나 그 모든 상황을 폭력적으로 종결해버린다는 이 내용은 조지 V. 히긴스의 70년대 범죄소설에 기초했다. 앤드루 도미닉은 시대를 오바마와 매케인이 경선을 벌이던 2008년으로 그리고 장소를 보스턴에서 뉴올리언스로 옮겨놓는다. 우매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어처구니없이 엇갈린 방식으로 서로 난폭하기 짝이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여기에 오바마 시대에 도래한 미국 경제난에 관한 우울한 메타포가 들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그런 사회적 해석이 아닌 다른 데 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는 괴이한 인물, 그들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코맥 매카시 소설에 빚진 코언 형제 영화의 배경에 마틴 스코시즈의 인물들이 결합한 것 같은 그 장르적 비장함과 살벌함 내지 우아함이 매력이다. 운명과 책임이 서로 엇갈리는 비정한 오해의 드라마가 피도 눈물도 없이 펼쳐진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라이크 섬원 인 러브>
그리고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문제아(?)였던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는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건너뛰어서는 안될 것 같다. 첫 장면, 초원에서 어둠을 맞이하는 아이의 길고 긴 이미지는 신기하고 성스럽다. 그다음부터가 문제다. 밀림에 사는 중산층 가족과 하층민 가족의 분절된 일화를 오랫동안 천천히 의미파악하기 어려운 순서로 보여준 다음 영화는 스스로 목을 뽑아버리는 남자(비유가 아니라 실제 자기 손으로 목을 뽑는다)에까지 이른다. 특징이라면 과장되고 과격한 미학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처럼 레이가다스의 영화를 졸작이거나 걸작으로 만든다. 이번에 그 과장됨과 과격함은 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목표로 두었던 것 같다. 그는 논리적 이야기를 배제하기 위해 철저하게 감각적인 시청각을 추구한다. 전에 없이 좁은 화면비율을 구사하고 화면의 가장자리를 뭉개서 흐릿하게 만드는 난생처음 보는 형식들도 도입한다. 레이가다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가 “이성이 가능한 한 적게 개입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겨냥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걸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작으로 남았고 올해는 유독 형식의 과격함이라는 성깔을 보인 작품이 적었기 때문에 수상의 행운까지 차지했다.
형식의 가장 과격한 끝점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가 만든 소품 같은 극영화 <라이크 섬원 인 러브>를 그다음에 말해야 할 것이다. 노교수의 집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초대받는다. 말하자면 원조교제다. 하지만 그녀는 피곤하다며 이내 잠들어버리고 노교수는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우연히도 노교수는 다음날 그녀의 행적을 의심하는 그녀의 애인까지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애인은 노교수를 그녀의 할아버지로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내 밝혀진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이 창조했던 예의 그 신기한 구조적 다면체를 아예 모르는 척한다. 그 대신 하나의 선으로 얇게 이어지는 섬세한 정서를 붙들어가며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구조가 완화되고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다른 장점이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세밀하고 섬세하게 박자가 맞아가는 그 속도감과 운동성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정겨운 원조교제 이야기(?)는 그렇게 따뜻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때때로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곧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키아로스타미는 차 안에서의 장면을 비상한 앵글로 찍어내기도 한다. 라스트 신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시 구조적 도전이 장면 전체를 감싼다. 사태를 파악한 다음 화가 나서 노교수의 집을 맴도는 여자의 남자친구는 다양한 소리로만 존재하고 집 안에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노교수는 동선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갑자기 발생하는 마지막 ‘봉변’이 사건의 긴장감을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놀라다
대부분 예상치 못했고 솔직히 말하면 거의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상영 이후 갑자기 화제작이 된 경우가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다. 개인적으로는 마감일과 겹쳐 보지 못했는데 동료 기자와 현지 평자들의 반응을 모아보면 호평 일색이다. 하루 종일 다른 무언가의 인물로 변신하는, 말 그대로 배우의 삶을 은유하는 어떤 남자를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데 그의 변신 자체가 놀랄 만하며 그 변신이 영화와 배우의 존재론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하지만 어쩌면 레오스 카락스가 정말 수작을 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프랑스 매체들은 레오스 카락스가 수상권에 들지 못한 것을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실수로 꼽을 정도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눈을 감고 듣지 않은 건 이번 심사위원들이 역사에 남을 만한 몰상식한 취향을 드러낸 것이다”(<인록>) 등이 대표적인 평이다.
뒤이어 우리는 마치 <홀리 모터스>에서처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나타난, 후반부 최고의 괴작이자 걸작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를 말해야만 한다. 올해 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를 각각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동시에 초대했는데, 두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아들의 영화는 기획상품에 불과했거나 아직 아버지의 영화만큼 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코스모폴리스>는 또 다른 부자에 의해 기획되었고 크로넨버그의 손에 우연히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제작자 파울로 브랑코와 그의 아들이 직접 크로넨버그를 찾아와 제안하면서 성사된 프로젝트다. 그렇게 크로넨버그는 돈 드릴로의 원작을 2주 만에 각색했다. 머리를 깎고 싶다며 리무진을 타고 뉴욕의 동부에서 서부를 횡단하는 이 괴상한 억만장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성공한 젊은 억만장자는 대통령의 퍼레이드가 있던 날, 분노하여 들끓는 시민들 사이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움직인다.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을 차 안에서 만나거나 그 주변에서 만나 대화하는 것이 거의 이 영화의 전부다. 아내와 미술상과 또 다른 재정 전문가를 만나고 혹은 한 남자에게 파이로 얻어맞기도 하고 직원이었던 남자에게는 살해 위협도 받는다. 지극히 표면적인 관계 혹은 추상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와중에 크로넨버그의 가장 급진적인 미니멀리즘이 완성되는데,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는다. 액션 페인팅의 미술작품처럼 보이는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하여 다시 그와 같은 엔딩 크레딧으로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피로할 정도로 그 대화를 듣고 그 피로한 대화가 걸작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흡혈귀의 왕자 로버트 패틴슨은 여기서 잘생겼다기보다는 창백한 인상으로 피로함을 드러내며 그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걸 입증해 보인다. 그가 타고 다니는 영화 속 리무진이 움직일 때 그 바깥의 공간과 안의 공간은 마치 행성과 행성 사이처럼 멀게 느껴지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그 리무진을 타고 억만장자는 머리를 깎겠다며 뉴욕을 배회한다.
여기에 궁금증이 더해질 만한 크로넨버그의 말 한마디를 전하려 한다. 크로넨버그는 인터뷰에서 문득 이런 문장을 인용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다름 아니라 이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 아닌가. 동시에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가 그 문장과 관련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크로넨버그의 그 말은 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코스모폴리스>는 다만 유럽이 아니라 뉴욕, 그리고 역으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유령으로 지금 배회하고 있다. 크로넨버그는 덧붙였다. “저는 마르크스가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종종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가 이미 예견했던 많은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 말을 전하는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나만의 수상작’을 꼽는다면…
2012년의 칸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몇 가지 경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새로운 이름의 발견이 전무한 대신(심지어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조차 그러했다) 기존 거장들의 새로운 영화가 많았던 한해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겠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마테오 가로네, 세르게이 로즈니차, 크리스티안 문주 등이 칸의 새롭게 부상하는 이름들이라면, 칸영화제에서의 놀라운 발견의 목록은 당분간 작성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정이 되었건 긍정이 되었건 매번 각자의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칸영화제에 관한 마무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때문인지 <인록>과 <텔레라마>의 기자들은 앞다투어 각자의 ‘나만의 수상작’을 가상으로 뽑았고, <인록>의 경우는 집계까지 냈다. 그들은 황금종려상 <홀리 모터스>, 심사위원대상 <다른나라에서>, 감독상 <코스모폴리스>, 남우주연상 장 루이 트랭티냥,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를 선정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목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상하는 대신 그 명단을 나열하기만 할 것이다. 여기엔 트로피도 부상도 없고 다만 존중과 공감과 경애만이 있다. 2012년 22편의 경쟁작 중 2012년 칸에서 우리가 사랑에 빠진 영화의 명단을 ‘상영순서’대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 홍상수의<다른나라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라이크 섬원 인 러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올해의 칸영화제가 뜻깊었다면 그건 그 어느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화들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