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는 어떠한 즉흥연기도 원하지 않는다”
2012-06-1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황금종려상 받은 <아무르>의 미하엘 하네케 감독 인터뷰
<아무르> 촬영현장의 미하엘 하네케 감독, 에마뉘엘 리바, 장 루이 트랭티냥.

<아무르>의 관계자에게서 당부의 말을 들었다. 감독 미하엘 하네케가 시간 약속에 민감하니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20분 전까지는 인터뷰 장소에 와 있어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당부의 말 자체가 ‘하네케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 어떤 정확성에 관한 강박 혹은 그게 지켜지지 않을 경우의 사태에 대한 정중하면서도 엄중한 경고이기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어쩐지 예술적 완벽주의자 하네케의 세상에 대한 냉혹함이 그 순간 우회적으로 떠올랐다고 말해도 맞을 것이다. 그 예술적 완벽주의와 냉혹함으로 그는 이번에 노년의 피하지 못할 삶을 그려냈고 그로써 가혹한 슬픔을 자아낸다. 80대 노부부의 삶에서 아내가 반신불수가 되고 남편만 홀로 남아 그녀를 간호해야 할 때 사랑의 가치란 어떤 것이 되는가. 그는 다시 또 냉혹하게 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의 방문 앞에 서 있을 때 하네케는 정말 정확한 시간에 문을 열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살고 있는 사람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씨네21>을 맞았다. 우리가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영화는 이미 영화제 중반의 가장 뜨거운 화제작으로 떠오른 직후였고 황금종려상 후보작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가 “내 영화의 핵심”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두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과 에마뉘엘 리바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어떤 촬영의 원칙들 그리고 주제와 형식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그는 “이 영화는 당신의 새로운 이야기”라는 표현을 듣자마자 “이건 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새로운 주제”라고 강조하며 수정해주었다. 어느 냉혹한 완벽주의자의 삶에 관한 새로운 주제, 그러니까 그렇게 하여 태어난 한편의 지독하게 슬픈 영화가 올해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내가 정말 사랑했던 내 가족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됐다. 아주 고통스런 경험이었다고만 해두자. 그 경험이 나를 돌아보게 했고 마침내 각본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개인적 상황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죽음에 관련한 몇몇 장면들이다. 그 죽음의 문제는 전작에서도 그러했다. <하얀 리본>에서 어린 소년이 누이에게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누이는 “그래, 하지만 넌 아니야. 아버지도 아니고”라고 답해준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아주 무서웠다. 내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개인적 요소들이 들어간다. 나에게 아주 생생하게 다가오는 어떤 것이 있다면 이는 관객에게도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르>는 다리우스 콘지가 촬영했는데 카메라가 거의 예외없이 노부부의 집 실내만 보여준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주인공이 병원에 누워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회드라마를 만들 마음이 없었다. 누군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한 병원 드라마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인물들의 아주 친밀하고 개인적인 초상을 그려내고 싶었다. 동시에 중·상류층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를 간호할 때 호스피스가 아닌 자기의 집에서 돌보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심각한 상황을 다룰 때에는 그에 적합한 형식적 접근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시간과 장소와 행동의 고전적 통일이라는 방식이 이 영화의 주제에 부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

고통스러웠던 경험에서 탄생한 영화

-(둘 중 한명이 아프기 전에)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완벽한 공생관계처럼 보인다. 그들은 항상 함께 있고 심지어 외동딸조차도 그들에게 외면당한다.
=그건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살면서 흔히 생기는 세대간의 문제인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 속 노부부와 딸처럼 서로 다른 도시에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남편 역의 장 루이 트랭티냥과 아내 역의 에마뉘엘 리바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는가.
=나는 처음부터 장 루이 트랭티냥을 남편 역으로 생각하고 각본을 썼다.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역할이다. 또한 에마뉘엘 리바는 다른 배우들과 다르다. 젊었을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간 그녀를 자주 만나보진 못했다. 그러다 이번 영화 캐스팅 때 그 연령대의 여러 여배우들을 만나보았고 그녀가 적격임을 확신했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일단 그녀 자신이 훌륭한 여배우이며 영화 속 장 루이 트랭티냥의 아내 역을 하기에 정말 잘 맞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각본을 쓸 당시부터 장 루이 트랭티냥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그는 존경받는 배우이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없었을 거라는 당신의 말은 그의 존재를 더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배우로서 그가 가진 따뜻함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했다. 이런 환상적인 아우라를 가진 배우를 나는 그 어느 나라 어느 연령대의 배우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에 그가 필요했다.

-그에게는 사실 표현해내기 어려운 감정이 많아 보인다.
=진정으로 훌륭한 배우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힘든 역을 찾아 나선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배역을 맡았는지를 떠들기보다는 처음 해보는 역할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려운 역할을 찾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진정한 보상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일류 배우들이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그런데도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당신은 그 눈물을 처음부터 의도하고 예상했나.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한 감정을 유발하려 했던 것이 내가 기대한 바이고 내 의도였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혹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는 것, 그것이 각본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어디에 클라이맥스를 배치하며 어떻게 예술을 창조할 것인가는 아주 까다로운 문제다. 특히 단지 한 장소에서 두 배우만으로 촬영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다음은 어떻게 관객의 몰입도를 높일지를 고민한다. 만약 배우가 스무명쯤 있고 액션도 많고 여러 로케이션에서 촬영한다면 이는 쉬운 일이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 관객이 계속 집중하게 만드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독일의 유명한 무성영화 코미디언 칼 발렌틴의 말도 있지 않은가. “예술은 아름답다. 하지만 고되다”라고 말이다.

-영화에 드러난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 차이에 대해 말해달라. 예컨대 이자벨 위페르가 맡은 딸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부모세대와 다르게 늘 돈이나 투자에 대해서만 말한다. 부모세대는 물론 거기에 관심이 없고.
=우리 모두가 그런 상황을 맞는다면 그 딸처럼 반응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를 것이다. 대신 고통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딸이 많은 말을 하면서도 부모에게 정작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서 이는 아주 흔한 반응이라고 본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미하엘 하네케 감독.

“나도 나 스스로에게 많이 놀랐다”

-본격적으로 노부부의 집으로 카메라가 들어가기 직전에 당신은 음악회의 관객석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마치 이제부터 이 주인공들의 삶을 무대 위에 놓고 바라보겠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관객을 초대해 직접 사물 그 자체와 연기를 보게 하고 싶었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 즉, 남자든 여자든 삶에서 그 어느 순간이라도 직면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이 부모든 조부모든 친구든 누구나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극장에 앉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본다면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크게 보일 것이다.

-이 영화 안에서 음악의 역할에 대해 말해주면 좋겠다.
=<아무르>에서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나는 음악을 현실적으로 쓰는 것을 좋아한다. 영화의 장소인 아파트는 나의 부모님이 살던 아파트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 나의 양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는데 그런 부분이 영화에 반영되었다.

-이번에도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했다.
=나는 서로의 신의를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이다. 말하자면 항상 독일에서 영화를 만들고자 하고 같이 일했던 배우를 다시 캐스팅하고 서로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있는 스탭들과 일하려고 한다. 반면 새로운 배우와 함께 작업할 때에는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소통의 어려움이나 위험이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심지어 각본을 쓸 때에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당신은 촬영에 들어갈 때 항상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치는 편인가?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머릿속에 미장센이 다 그려져 있나.
=그렇다. 촬영에 들어갈 때 나는 항상 모든 준비를 완벽히 해놓는다. 촬영장에서 ‘이럴 줄 몰랐다’는 식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만약 나의 세트 디자이너가 “미안하다, 테이블 위에 물 한병이 놓여 있는지 미처 몰랐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면 그 자그만 물병 하나도 꼭 치워야만 한다.

-그런 식의 완벽주의 연출법에 혹시 답답해하는 배우는 없는가.
=<퍼니 게임>을 찍을 때 나오미 왓츠가 조금 짜증내긴 했다. (웃음) 그녀는 <퍼니 게임>의 독일 버전의 주인공 수잔네 로타를 모델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건 수잔네 로타가 아니고 나오미 왓츠라고 했다. 그녀가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야 촬영이 훨씬 쉬워졌었다.

-당신은 어떤 즉흥 연기도 원하지 않는가.
=그렇다.

-이 영화는 당신의 전작들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다. 당신 자신도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은가. (웃음)
=일단 이 영화의 새로운 건 이야기가 아니라 주제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주제!! 그런데 놀랐느냐고? 맞다. 나도 정말, 정말, 정말 나 자신에게 많이 놀랐다. (웃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