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의 수상결과와 현지반응 등에 관해서는 앞선 리포트에서 얼마간 전한 것 같다. 지난호에 이어 이 자리에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만을 말하려 한다. 일단 지난 해의 엉터리 심사위원들과 비교하자면 올해 심사위원들은 대체로 신중함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기세가 좋았던 <아델의 삶-1&2>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럼에도 아쉬가르 파라디의 <과거>,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위대한 아름다움>, 알렉산더 페인의 <네브래스카> 등 적어도 현혹되기 쉬운 영화들을 피해 나간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긴장도 좋고 영민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서사의 덧댐이 지나쳐서 영화적 얄팍함이라는 한계도 동시에 보이고 있는 <과거>, 자칫 대단하고 집요하게 구축된 이미지의 성채라고 착각하게 될 수도 있는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와 <위대한 아름다움>, 인물에 부여된 정겨운 정서로 인해 실제 영화가 지닌 소박한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었던 <네브래스카>를 고르지 않은 건 선방한 것이다. 그 대신에 신중하게 보아야만 장점을 느낄 수 있는 코언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수상권 안에 두었다는 건 이번 심사위원들의 가장 큰 공적이다.
그래도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헬리>가 감독상을 수상한 건 여전히 영화제의 심사라는 것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홀랑 넘어갈 기술 좋은 타짜들이 영화제에는 늘 있다. 아마트 에스칼란테가 올해 온 감독 중 그 손기술이 가장 좋은 타짜였는데 적어도 그는 감독상 하나는 훔쳐갔다. 무엇보다도 심사결과에 가장 동의할 수 없는 건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가 어떤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솔직해지자면 <이민자>가 수상권에 들지 못한 것에 동의하진 않지만 불만도 없다. 실은 불만스럽지 않거니와 은근히 흡족하기까지 하다. 영화마다 자기의 운명이 있는 것이고 그게 그 영화와 나와 몇 사람만이 나눠가진 운명 공동체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대로도 좋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가 경쟁부문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황금종려상도 당연히 제임스 그레이의 것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이 영화가 역사에 남을 공식적인 자리에 오르는 대신 임시적이나마 나의 운명 공동체 안에 남아주어서 고마울 뿐이다.
<아델의 삶-1&2> 속 아델의 입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델의 삶-1&2>는 좋은 영화다. 십대 후반의 소녀 아델은 레즈비언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잘생긴 또래 남자아이와 연애 감정도 가져보려 애쓰지만 잘되지 않는다. 며칠 전 길거리에서 지나쳤던 푸른 머리칼에 몇살 연상으로 보인 매력적인 여자가 계속 생각날 뿐이다.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게이 바에 들렀다가 자기도 모르게 레즈비언 바로 발걸음을 옮긴 아델은 거기에서 푸른 머리칼의 그 여자 엠마를 다시 만나게 된다. 둘은 이내 친구를 넘어 격정적인 연인관계로 접어든다.
젊은 두 여배우의 연기가 좋다는 건 알려진 그대로다. 그리고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젊은 여배우의 연기 연출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생선 쿠스쿠스>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아델의 삶-1&2>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장면은 두 여배우의 정사장면인데, 그 표현의 수위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반론의 성격을 지녔음을 느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장면은 일부러 보란 듯이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오래 그려져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매혹된 장면은 따로 있다. 대개 주인공 여배우 아델이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었는데, 잘 먹어서뿐만 아니라 잘 먹는 그녀의 입이 걸작이다. 그 매혹에 확실한 근거가 있음을 뒤늦게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알게 됐다. 아델 역의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와 오디션 겸 점심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감독은 레몬 타르트를 씹는 그녀의 입의 움직임을 보고 그녀가 적역임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의 입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도 했다. 먹기도 하고 섹스도 하는 입의 어떤 선택. 감독의 그 선택에 동감한다. 이 영화의 가장 멋진 장면은 대개 그녀의 입에 시선이 가는 순간들이다.
반면 <아델의 삶-1&2>는 현실 속 소수자의 삶에 공감하게 하는 보편적 이해도나 영화적 집중도가 높은 편이지만 그것 때문인지 가장 좋은 영화들이 필연적으로 갖추고 있는 무언가가 하나 빠져 있기는 한 것 같다. 이를테면 어떤 저항선이다. 나는 반드시 영화가 아닐지라도 진실로 뛰어난 창작품들이 대개 양식적으로 일정한 감상의 저항선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게 그 작품들을 보편타당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창작자의 특수한 표식이며 그것으로 저항감도 일어나지만 또 그 저항감을 넘어설 때야말로 우리의 감상은 어떤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도 되는 것이다. 예컨대 유사한 소재로 묶음직한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은 그 저항선을 갖추고 있으며 한편으론 감상의 저항감을 일으키는 동시에 마침내는 그걸 넘어서 작품 자체가 신비의 상태로 접어든다. 반면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아델의 삶-1&2>는 영화 내내 저항선 바로 언저리 아래 유능하고 적절하게 머무는 쪽에 가깝다. 이 영화가 단시간 내에 고른 지지를 얻어내고 여럿이 모여 원만한 합의를 이뤄야 할 때 거의 최적의 작품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델의 삶-1&2>에 관해 처음 한 말을 조금 수정해야겠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다만 가장 좋은 영화가 아닐 뿐이다. 역으로 그게 이 영화의 가치이며 동시에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명예로운 결과도 가능케 했다.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와 <위대한 아름다움>의 허세 그리고 뻔뻔함
허세에 관한 첫 번째 이야기.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경쟁부문에 나란히 올라 있는 두편의 영화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와 <위대한 아름다움> 중 어떤 영화의 제목이 더 거창해 보일까. 사실 둘 다 똑같이 거창하다. 거대한 아름다움에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고 제목을 짓는 것이 소박해 보이진 않는다. 다만 제목의 세기는 유사하지만 당장에 더 나쁜 쪽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이다. 방콕에서 복싱클럽을 운영하는 동시에 마약을 취급하는 줄리안. 그의 형 빌리가 어린 매춘부를 살해하고 그 자신도 살해당하면서 어쩔 수 없이 줄리안은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설상가상으로 무섭고 가혹한 엄마까지 찾아와 싸움판은 더 커지고 사태는 엉망진창이 된다. 줄리안이 맞서야 하는 것은 ‘창’이라는 이름의 중년의 타이인으로 거의 법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무소불위의 자경단원이다. 그의 싸움 실력은 가공할 만하다. 감독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멋있게 말했다. “이 영화의 원래 컨셉은 신과 싸우기를 원하는 어떤 한 인간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창이 신이라면 줄리안이 신에 대항하는 자라고. 소개한 줄거리만 본다면 그럴 것도 같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근거는 명료하다. 존재론적인 질문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말인데 이 영화에는 그런 질문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최근 영화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잘못 알려진 것처럼 거기에 무슨 유럽식 스타일의 진지한 계승이나 무드가 배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인물들이 언제인가부터 화려한 원색의 세트 안에서 지나치게 느리게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게 그의 최근 두편의 영화 <드라이브>와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가 눈을 현혹하는 방식이다. 두 영화는 허세로 뭉친 B무비다. 이때의 허세는 양식의 과장됨이다. 물론 나는 B무비의 매력을 즐기는 편이고 그런 과장됨의 영화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라면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를 탓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전작 <드라이브>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에는 그것과 다른 종류의 허세가 있고 그게 정작 문제가 된다. 즉, 없는 걸 있는 척하는 허세다. 이건 엄연히 양식의 과장과는 다른 종류다.
이 두 가지 다른 허세는 두 가지 다른 뻔뻔함과도 연관될 것이다. 어떤 영화의 뻔뻔함은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이에 대한 예로 나는 곧 자무시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를 예로 들 생각이다). 실은 그런 게 B무비의 끈질기고 매력적인 속성 중 하나다. 그런데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에는 그 이외에 못된 뻔뻔함이 있다. 존재론적 탐구를 자기 영화가 수행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그게 자기 영화에 이미 다 있는 것처럼 행세하려는 뻔뻔함이다. 그건 다른 B무비들을 배신하는 비겁한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 있는 건 그냥 과장된 스타일일 뿐인데 거기에 마치 신과 인간의 질문이 들어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얄팍한 짓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유럽식 영화를 계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신작은 유럽식 영화의 계승에 그토록 우호적인 프랑스의 많은 평론가들에게서 올해 가장 많은 폭탄을 수여받았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허세가 니콜라스 윈딩 레픈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그는 없는 걸 있는 척하진 않는다. 다만 그의 문제는 있는 걸 고민하는 그 고민의 방식이 매우 너저분하다는 데 있다. 실은 개인적으로 <위대한 아름다움>을 내심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실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강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가 어긋났고 불운하게도 예감이 맞았다. 이 영화의 예고편 때문에 기대됐으리라. 그 리듬이 우아하고 장중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소렌티노의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 노년의 작가가 로마를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내용은 어쩌면 소렌티노 영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아닐까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어쨌거나 로마의 거대한 성과 궁과 그 안에 놓인 거대 조각상들 사이를 우리의 주인공이 새벽 산책하듯 돌아다니는 장면들에서는 말 그대로 위대한 아름다움의 자태가 드러난다. 우스꽝스러움과 고독함이 동시에 깃든 이탈리아의 명배우 토니 세르빌로의 표정은, 사람이 표정으로 춤을 출 수 있다면 저런 것이리라 상상할 정도로 훌륭하기만 하다. 그런 것이 바로 개별의 장면마다 독특한 완성도를 뽑아낼 줄 아는 소렌티노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보며 새삼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된 것은 그가 개별의 아름다운 신(scene)을 만드는 데에는 천재적이지만 그 신들을 연결할 때에는 거의 방종에 가까울 정도로 느슨하다는 사실이다. 소렌티노는 장면의 연쇄가 아니라 각각의 장면들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소렌티노는 구조의 끈을 놓쳐버린 난잡한 콜라주가 기승전결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기 연출의 특별한 길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 실패작의 최대 견본이 <아버지를 위한 노래>였는데도 <위대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아직 그쪽에 가깝게 서 있다. 나는 소렌티노의 보다 소박한 영화 <사랑의 결과>에 깃들어 있던 사람과 인생과 고독에 관한 그 귀여운 허세의 미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실은 신작에 대한 실망을 표명한 이 순간에도 그런 까닭으로 그의 영화를 여전히 멀리하고 싶진 않다. 언젠가 펠리니가, 즉 <위대한 아름다움>을 만들며 소렌티노가 마음 깊이 염두에 두었다고 털어놓았던 그 선배 감독 펠리니가 영화사의 가장 독창적인 허세의 미학으로 <카사노바> <사티리콘> 등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처럼 언젠가 소렌티노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또 한번 기약할 뿐이다.
또 다른 허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뱀파이어
허세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 만약 올해 칸에 온 감독 중 허세로 예술의 일가를 이룬 감독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니라 짐 자무시인 것 같다. 우주의 별빛으로부터 영화는 시작한다. 레코드판이 돌아가듯 빙글빙글 수직 부감으로 앵글이 돌면 저 아래 한 사람은 남자, 또 한 사람은 여자다. 아니 하나는 남자 뱀파이어 또 하나는 여자 뱀파이어다. 남자 뱀파이어 ‘아담’은 디트로이트에 있고 여자 뱀파이어 ‘이브’는 탕헤르에 있다. 서로 떨어져 지내던 두명의 뱀파이어 연인은 이제 만나기로 한다. 이브가 아담이 있는 디트로이트로 향한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드라이브도 하고 즐겁게 피도 나눠 마신다. 그런데 얼마 뒤 이브의 젊은 여동생 뱀파이어 ‘에바’가 디트로이트를 찾는다. 에바는 말썽쟁이어서 멀쩡히 살아 있는 젊은 남자의 피를 빨아먹는 사고를 친다. 마침내 아담과 이브는 에바를 쫓아내듯 LA로 돌려보내고 자신들은 디트로이트를 떠나 탕헤르로 간다. 거기서 마침내 멋있는 음악 공연을 보게 된다.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나 제목의 거창함으로는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제목이 밝힌 그 내용 ‘오직’과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남음’을 담아내기 위해 한편의 영화를 절묘하게 다 바친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 영화에 관해서는 난해하다는 말들이 먼저 들려왔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감상들은 오히려 이 영화의 이러저러한 유머를 즐기지 못해 그렇게 여긴 게 아닌가 싶다. 캐스팅에서부터 일종의 유머다. 가벼운 문제를 하나 내보자. 현존하는 여배우 중 뱀파이어 역에 가장 어울릴 만한 여배우는 누구인가. 사실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이 정답은 틀리기가 더 어렵다. 틸다 스윈튼을 일순위로 떠올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의 기획은 7년 전에 시작됐고 중도에 진전이 없는 짐 자무시를 계속 독촉한 것도 틸다 스윈튼이라고 짐 자무시는 밝혔다(남자 뱀파이어 아담은 톰 히들스턴, 이브의 여동생 뱀파이어 에바는 박찬욱의 <스토커>의 여주인공 미아 바시코프스카다).
이 영화에는 몇 가지 묘한 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들이 마시는 피의 용도다. <박쥐>에서 상현(송강호)은 배가 고파 살기 위해 피를 호스로 쭉쭉 빨아마신다. 그에게 피는 전적으로 식량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 피는 그런 식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아담과 이브는 피를 마실 때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희열에 빠지는 것 같은 몸동작을 취하곤 한다. 그들은 피를 마실 때 꼭 약에 취하는 것처럼 몸을 떨고 또 피가 떨어지면 약이 떨어져 허덕이는 중독자들처럼 괴로워한다. 자무시가 종종 등장시키는 환각에 관한 행위들은 여기서도 은밀히 무언가 되풀이되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영화 속 뱀파이어들이 예술가이며 동시에 예술품을 사랑하고 감상할 줄 아는 교양인들이라는 점이다. 아담은 음악가인데다 고가의 기타를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이브는 여행할 때 무엇보다도 그녀가 지닌 책들 중 아끼는 책들을 어떻게 가방에 담아갈 것인가 하는 데 골몰하는 뱀파이어다. 그와 그녀는 악기를 보면 음, 이건 어떤 장인이 언제 만들고 이런 장점이 있는 것이군 하고 서로 대화를 한다든지 그냥 아무렇게 오래 방치된 것 같은 건축물을 보면서도 어떤 건축가가 그걸 만들었는지 그 기원을 기억해낸다. 두 뱀파이어가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사람을 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나른한 표정으로 다윈과 슈베르트와 아인슈타인과 잭 화이트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브에게 피를 공급해주는 이의 이름은 저 유명한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렇게 사실과 전설로 묶여있는 그 극작가. 하여간에 이 뱀파이어들은 영화 역사상 가장 교양 넘치고 유식한 뱀파이어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유머러스한 상상의 핵이 있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오래 살아남게 된다면 그가 지닌 지식과 예술 창작 및 감상의 태도는 어떠할 것인가. 언제나 한명의 예술가보다 하나의 예술품이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또한 한명의 감상자보다 하나의 예술품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게 인간과 예술품 사이의 운명이다. 그런데 이 뱀파이어들은 그 예술품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예술가이고 감상자다. 그럴 때 예술품과 이 창작, 감상자의 관계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한 역발상의 질문들이 여기 있는 것 같다. <맨 인 블랙>에서였던가, 스티븐 스필버그도 외계인이라고 했다. 그 외계인은 올해 자신이 심사를 맡은 짐 자무시의 뱀파이어들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적어도 한명의 인간에 불과한 내게 이 뱀파이어들의 교양 유머집은 그 과장됨의 방식이 아주 유려할 뿐 아니라 더할 수 없이 사려 깊어 보여서 마음에 쏙 든다.
‘역사’에 관하여 <데스마치> <더 미싱 픽처> <더 라스트 오브 언저스트>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영화 <데스마치>를 보던 날이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내 뒤에 선 남자는 두어번이나 더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다. 감독은 그의 영화에 대한 관객의 분위기가 궁금했거나 상영 기술 체크 같은 것을 하고 싶어 들어왔다가 기왕에 들어온 거 기념사진도 얼른 남기자는 생각에 그랬던 모양이다. 이 젊은 감독에게는 모든 게 다 추억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이 영화가 나의 추억이 되진 못한 것 같다. 2차대전 중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있는 필리핀 병사들. 여기저기 행군 중 낙오자가 발생하고 참수당하고 그 사이에 포탄들이 날아든다. 이 영화는 이 모든 장면을 실제로 재현하는 대신 숲과 강과 나무들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판을 마치 연극 무대의 배경처럼 떡하니 뒤편에 붙여놓고 배우들이 그 앞에서 연기하고 있다. 그런 연극적인 배경과 인물들의 영화 연기의 조우가 처음엔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끝내 납득시키지 못했다. 영화에 독특하게 쓰인 그 재현 방식이 어떤 자기 필요에서 나왔는지 납득시키는 데 무능했다. 그것이 단지 비용 절감의 구실로밖에 보이지 않자 이 영화는 금방 지루해졌고 뒤편의 그림들은 흉물스러워 보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에 같이 오른 캄보디아 난민 출신의 프랑스 감독 리티판의 <더 미싱 픽처>는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가 무심하게 생각한, 역사를 재현할 때의 미학과 재현 방식의 관계에 대해 현명하게 인식하고 만들어진 영화다. 이 다큐멘터리영화에는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리티판이 아버지, 어머니, 삼촌을 생각하며 손수 영혼을 불어넣어 만든 조그만 찰흙 인형들이 등장한다. 리티판은 그 옛날 자신이 유년을 보낸 폴 포트 독재정권하 캄보디아의 정황들을 이 인형들과 몇개의 자료화면과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 의존한 시적 진술로 완성해낸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불타버린 극장의 예술가들>과 같은 그의 소박한 작품을 더 좋아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리티판은 역사적 재현 방식에 관한 한 <S21: 크메르 루주 킬링머신>과 같은 기념비적 작품을 이미 남긴 바 있다. 그리고 <더 미싱 픽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의 자기 대답이다. 내가 재현할 수 없는 증거 부재의 역사를 나는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이 방면에서 영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작품이었던 건 역시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였는데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바로 클로드 란츠만의 새 영화 <더 라스트 오브 언저스트>가 있었다. <더 라스트 오브 언저스트>는 그가 <쇼아>를 준비하던 당시였던 1975년에 길게 인터뷰했으나 정작 <쇼아>의 전체 맥락과는 동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주요하게 넣지 못한 베냐민 무어멜슈타인을 중심으로 하고있다. 무어멜슈타인은 나치가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모델로서 양성한 유대인 게토 지역 테레지엔슈타트의 우두머리급 유대인이었으며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유대인 학살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저술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란츠만은 예의 그렇듯이 그 학살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무어멜슈타인의 화려하고도 복잡한 역사적 진술로 진입해 들어가며 무어멜슈타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이슈를 넓혀간다. 아주 능수능란하다. <쇼아>의 후광을 아직도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가 종종 제기하는 어떤 쟁점의 매서움을 보고 있자면 이것이 과연 88살의 노구를 이끌고 만든 영화가 맞는지 놀라워진다. 영화 상영이 있던 날 이 냉철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저널리스트가 무대에서 보여준 매너는 일종의 보너스 같은 경험이었다. 그를 소개하기 위해 함께 무대에 올라온 칸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 티에리 프레모가 영화의 긴 상영시간을 염두에 두었는지 길고 화려하게 말하는 란츠만을 제지하려 하자 란츠만이 거의 꼬마를 다루듯 프레모를 다시 가볍게 제압할 때 란츠만의 <쇼아>가 가졌던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이야기꾼의 화술과도 같은 능청스러움과 그 어떤 집요한 저널리스트의 노련함이 거기 존재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네브래스카>의 산들바람을 넘어 <이민자>의 겨울밤으로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기구독 홍보 차원에서 어떤 잡지사가 자, 당신이 바로 100만달러의 주인공입니다, 같은 문구를 적어놓고는 그 보증서 비슷한 걸 무작위로 보냈는데 상태가 다소 좋지 않은 우리 아버지가 그걸 고이 간직하고는 내가 100만달러에 당첨됐다며 거기에 가면 반드시 그 돈을 줄 것이라고 아무리 말려도 매일 집을 가출할 때 자식인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 <네브래스카>에서 아들 데이브는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라 여겼는지 함께 가는 걸 택한다. 어쩌다보니 이 여행은 그리하여 아버지, 어머니, 형과 함께 가는 가족여행이 되고 만다. <네브래스카>는 이 가족이 경품을 받으러 몬태나에서 네브래스카까지 함께 가는 이야기다. 가는 도중 고향에 들렀을 때 아버지의 말은 와전되고 그가 이미 졸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돈을 달라고 들러붙으며 사건은 또 불어난다.
위와 같은 이야기인 <네브래스카>는 뛰어나진 않지만 보기에 그냥 소박한 영화다. 한 모금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산들바람 같다. 이 영화가 흑백인 이유는 이 여행의 정서적 핵심이 아버지의 과거에 닿아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 해도 종국에는 누구 하나 크게 다치는 감정들 없이 곧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작고 산뜻한 과거의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 작고 산뜻한 과거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이제 마지막으로 말할 크고 깊은 과거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와 연이어 보아도 좋겠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 이유는 1920년대 초 뉴욕의 이민자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 미국영화 한편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누군가에게는 너무 거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의 희석이 필요한 당신이라면 그럴 필요도 있겠다. 그 폭풍 같은 소용돌이의 영화가 바로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다.
그레이가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로 생각하는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언젠가 그레이의 심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전부 미국의 이민자다. 그게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두개의 문화라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 우리의 아버지의 문화와 우리 자신의 문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내 어머니는 말씀하곤 하셨다. 너는 행운아야, 왜냐하면 너는 미국인이기 때문이지. 미국은 모든 나라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나라니까 말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그러나 절대로 네가 이탈리아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이탈리아인들이야말로 예술과 음악과 문화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해왔으니까 말이다. 확신컨대 제임스(그레이)도 그것과 똑같은 이중의 충정을 느낄 거다.”
코폴라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레이가 알려진 대로 러시아 이민자(더 정확히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지방에서 온 이민자) 3세이기 때문이고 그의 영화에 가족과 혈통과 국적과 시민에 관한 문제들이 자주 중요한 사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영화 <이민자>는 마침내 자신의 그 이중적 기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것처럼 1920년대 초에 성큼 도착해 있다. <이민자>를 시작하게 된 동기 자체가 그레이가 그의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 한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였다. 그러니까 정체성의 이중적 상태에 관해서라면 코폴라의 말은 당연히 맞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다. 그레이는 <이민자>에서 그 혈통의 이중적 기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가 늘 더 빠져들던, 비극과 비애의 분위기에 다시 또 끌리고 있다. 이렇게 비극에 이를 때 <이민자>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역시나 원형적인 비극, 그 사랑의 삼각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1921년에 폴란드인 에바는 동생과 함께 엘리스 섬을 통해 뉴욕으로 들어오려다 동생은 출입국소에 남겨두고 자신만 들어오게 된다. 브루노가 그녀의 정착을 돕는다. 하지만 브루노에게는 꿍꿍이가 있다. 아름다운 에바를 자기가 운영하는 쇼단의 쇼걸로 일하게 하고 필요하면 또 언제나 매춘도 시키려 한다. 에바는 처음에 브루노에게서 도망치려 하지만 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며 그가 시키는 일들을 한다. 브루노의 사촌이자 쇼단의 마술사이며 거친 브루노와는 비교되는 다정다감한 남자 올란도가 에바 앞에 나타난다. 올란도는 에바에게 멀리 도망칠 것을 제안하지만 에바는 동생을 생각해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브루노와 올란도 사이의 골은 깊어진다. 20세기 초 뉴욕 이민자 사회의 포주와 매춘부와 마술사의 삼각관계는 그렇게 끝이 없다.
이 안에서 비극과 비애는 어떻게 그려지는 것일까. 세 인물의 원형적인 비극의 삼각관계가 힘을 발휘한다는 건 물론이다. 감독 자신이 이 영화를 두고 “속죄와 구원이라는 이민자의 테마”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 인물들이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니 어쩌면 더 말초적인 것들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저 음악과 색감. 느리게 반복을 거듭하는 우아한 테마 음악과 처연하고 유약해 보이는 저 노란색과 푸른색이 보는 이를 미치게 한다. 낭비되는 장면이 거의 없이 감정을 쌓아간다는 점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레이의 영화를 보면서 감정적으로 견딜 수 없는 순간을 맞고 마는 건 그 누적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뭘 원하나요?” “행복하기를 원해요.” “살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는 게 죄일까요?” 같은 비교적 평범하고 상투적인 대사조차도 그 축적된 자리가 어찌나 단단한지 들려오는 즉시 가슴을 친다. 그레이는 할리우드의 감독들 중 희귀하게도 장르적 운용을 따르지 않고 저 밑바닥의 인간 감정을 모조리 길어올리는 능력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는 반전이나 놀람이 별로 없고 어떤 운명의 힘이 강하다. 이 운명의 힘이 망설임이나 설렘 그리고 위태로움이나 피로함이나 우울함에 인물과 우리를 함께 빠뜨린다. 그레이의 첫 여주인공 영화인 <이민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 장 두셰는 그레이에 관한 짧고 강렬한 찬사가 담긴 글에서, 그의 영화에서 액션은 꾸준히 감정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며 궁극에 그의 영화는 액션영화 만들기의 불가능성을 드러내기까지 한다는 요지의 찬탄을 보냈다. 여기에 첨언을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레이의 인물들은 미래로 나아가려 하지만 과거에 발목 잡혀있다. <이민자>의 에바도, 브루노도, 올란도도 모두 그렇다. 과거에 붙들려 있다는 건 거절할 수 없는 감정에 붙들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레이의 영화에서 어느 순간 액션이 불가능해지는 건 거기 액션을 가로막는 큰 감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영화를 말할 때 그 영화에 공기가 담겼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처럼 만사형통의 표현은 많지 않다. 좋은 영화에는 정말 공기가 담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이의 영화에는 공기가 담기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밀도는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팽팽하다. 그레이의 영화에는 공기가 담기는 대신 물기가 흠뻑 묻는다. 내 기억에 이건 언젠가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투 러버스>를 보고 나서 전한 표현이다. 나는 그저 조금 더 첨언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 먹은 솜처럼 처진 삶들, 인물들이다. 그러니 그레이의 영화에서는 너무 피곤하여 적과 나를 사이에 두고 멋있게 싸울 만한 기력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태산이다. 그래도 그 순간에조차 꺼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고 그에 대한 결론으로 또 좌절을 겪는다. 어둡고 축축한 로맨스, 그러므로 그의 영화는 쾌감이 제대로 전해지는 액션영화가 되는 것이 실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다. 오로지 어둡고 축축한 멜로드라마의 상상력과 느낌이 동원되어야만 그의 영화가 제대로 느껴진다. 그레이 영화를 가리키며 논평한 장 두셰의 액션영화 불가능성에 대하여 나는 나름대로 이렇게 잠정적인 답변을 하고 싶어진다. 멜로드라마적 물기가 액션을 불능으로 만든다.
<이민자> 이후에 그레이는 SF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나는 그가 SF를 만들면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뛰어넘는 걸작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유는 한 가지다. 동시대의 어느 감독과 비교해도 그레이만큼 장르적 자장과 가까이 있으면서 또한 삶의 고독과 피로와 우울에 관하여 간절히 묘사할 줄 아는 감독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SF를 만든다면, 그것이 어떤 서사라 할지라도, 스필버그가 <우주전쟁>에서 보여준 그 두렵고 힘겨운 감정의 피로감과 고독감과 우울함 그 이상을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기대는 기대인 것이고, 지금 우선은 <이민자>가 전한 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득하다. <이민자>를 본 날 칸의 햇볕은 다른 날보다 유독 더 쨍쨍했다. 이렇게 자문하고 싶다. 한낱 영화라는 평면의 이미지가 실존하는 기후나 날씨를 잠시 잊게 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거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민자>를 본 날 칸의 햇빛은 뜨거웠지만 나는 마치 깊고 깊은 겨울밤에 조금은 고독한 감정으로 읽어내려 간 러시아의 어느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떤 영화의 이미지가 잔상으로 남아 날씨를 무색하게 하였다면 그런 게 바로 걸작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게 내가 <이민자>에 깊은 호의를 품게 된 근거다.
앙드레 바쟁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다시 두 번째 결어에 이르러. 칸영화제 주상영관 안에는 몇개의 상영관이 모여 있다. 뤼미에르, 드뷔시, 브뉘엘 등이 있고 가장 작고 아담한 상영관으로 바쟁이 있다. 칸영화제 관계자에게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그저 상식적으로 추론컨대 뤼미에르, 드뷔시, 브뉘엘과 같은 식일 테니 바쟁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그 바쟁에게서 아마 이름을 따왔을 것 같다.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헌사의 의미를 갖고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바쟁은 칸영화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싫어했다. 1947년과 48년에는 ‘안티-칸’을 조직하기도 했고 저세상으로 돌아가기 3년쯤 전인 1955년 37살에는 칸영화제에 관한 부정적 생각이 담긴 글을 쓴 적도 있다. 2주간 폭풍처럼 몰아치고 끝나는 칸의 지나친 성대함과 화려함과 어떤 강요된 의식들이 그 요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내게도 칸은 늘 영화를 보는 최선의 행사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최후의 행사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바쟁이라도, 그리고 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칸은 가장 좋은 영화제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영화제다. 매년 가장 중요한 영화들이 여기서 첫 상영을 하고 있으며 이 현실의 관례는 오래갈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본 영화들을 두번에 걸쳐 적지 않은 분량으로 전하려 애쓴 건 그에 걸맞은 어떤 일지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