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년 만의 귀환이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감독 제임스 그레이가 <이민자>를 들고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을 찾았다. <위 오운 더 나잇> <투 러버스> 등의 전작에서 선보인,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도피한 폴란드 여인 에바(마리온 코티아르)의 고단한 삶을 통해, 제임스 그레이는 많은 꿈들이 사그라지고 잊혀져가기도 했던 1920년대 미국의 초상을 애잔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이민자 조상을 둔 러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이번 영화의 테마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제임스 그레이와 그의 새로운 페르소나가 된 마리온 코티아르를 칸에서 만났다.
-<이민자>에 마리온 코티아르를 캐스팅하기 전에 그녀를 알지 못했다고. 어떤 인연으로 작업하게 됐나.
=그녀의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기욤 카네와 친분이 있었다. 몇년 전 내가 그의 영화 <블러드 타이>(이 작품은 올해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됐다.-편집자)의 영어 대사를 쓰기 위해 파리로 갔을 때, 기욤이 아내와 저녁을 같이 먹어도 되겠냐고 하더라. 그래서 좋다고 하고 부인과 함께 그 자리에 나갔더니 마리온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고 집에 오는데, 아내가 “당신, 그 여자 누군지 몰라?”라고 묻는 거다. 지난해에 <라비앙 로즈>로 오스카를 받았다면서. 내가 애가 세명이라 2006년부터 극장 가서 영화 볼 시간이 없었다. 특히 2006년에 첫 아들이 태어났거든. 그래서 <라비앙 로즈>를 챙겨볼 여유가 없었다. 마리온을 처음 봤을 때,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꼭 무성영화에 나오는 여배우 얼굴 같더라.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리온을 중심에 두고 시나리오를 구상했고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당신을 위해 쓴 시나리오가 있는데, 관심있어요?” 1주일 뒤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마리온의 영어 악센트를 흉내내며) “네. 전 당신 영화의 노른자가 될 수 있어요”라고.(웃음)
-<이민자>는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고립된 폴란드 여성 에바가 미국이라는 새로운 대륙에서 겪는 일들을 다룬다. 이이야기를 처음 구상하게 된 계기는.
=여행지에서 자다가 밤에 잠깐 깨어 모두가 잠든 모습을 볼 때 당신은 느끼게 될 거다. 이 세상엔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여행을 다녀온 뒤에 당신은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어떤 집단에 속하려고 애쓰게 될 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어느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상황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 아이디어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주인공이 절박하게 소속감을 원하고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야기는 <위 오운 더 나잇> 등의 영화를 통해 오랫동안 내가 관심을 가져온 테마이다. <이민자>는 그 테마를 좀더 확고하게 밀어붙인 작품이다.
-당신의 개인적인 가족사가 깊이 반영된 영화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 이민자가 아닌 폴란드 이민자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나?(제임스 그레이는 러시아계 미국인이다.)
=물론 이 영화엔 나의 개인적인 가족사가 반영되어 있다(자세한 이야기는 83쪽 마리온 코티아르의 인터뷰 참조). 하지만 내가 폴란드인을 선택한 건 완전한 이방인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나라에도, 새로운 나라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 말이다. 1921년에 폴란드는 내전을 겪고 있었다. 독일과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나라는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위협을 느껴 떠나려고 했다. 나는 이러한 폴란드의 역사적 상황이 내 캐릭터를 그리는 데 있어 가장 드라마틱한 배경이라고 봤다. 그리고 에바를 가톨릭 교도로 설정한 건, 속죄와 구원이라는 <이민자>의 테마에 걸맞은 설정일 것 같아서다.
-<이민자>는 당신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여성주인공이 등장한 첫 작품이다. 여성 캐릭터를 극의 중심에 두는 건 남성 캐릭터를 다룰 때와 어떤 차이가 있나.
=나는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걸 사랑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캐릭터를 통해 감정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감성을 담아내는 데에는 남성보다 여성 캐릭터가 더 수월하더라. 남성 캐릭터의 경우는 때때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총이나 폭발물을 써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경우는 감정적으로 더 진솔하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기는 더 쉽다. (웃음)
-엘리스 아일랜드를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엘리스 아일랜드는 잘 알려졌듯 미국 땅을 밟는 이민자들의 거취가 결정됐던 곳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도 <대부2>에서 엘리스 아일랜드를 조명하지만 실제로 거기에서 촬영할 기회를 얻진 못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묘사한 적 없는 그곳의 모습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스 아일랜드에서 촬영한다는 건 엄청난 희생을 요했다. 그곳은 관광지다. 달리 말해 우리는 해가 뜰 무렵이나 해가 질 무렵을 제외하고는 그곳에서 촬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곧 내가 엄청나게 많은 조명을 설치해야 한다는 얘기고, 조명을 옮기기 위한 엄청나게 큰 크레인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말 영화 촬영지로는 최악의 장소였지.
-이 영화는 중간급 예산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짜임새있게 완성된 느낌이다.
=중간급 예산으로 찍는 건 매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중간급 예산의 현장에선 어떤 예외도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는 절대 자막으로 이런 말을 하지 않지. 여배우가 오늘 두통을 호소하더라도 감독은 2시간밖에 촬영할 시간이 없다는 거. 포스터도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감독이 31일 만에 12억4천만달러를 가지고 찍어야 한다는 거. 다시 말해 누구도 내 문제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다. <이민자>를 촬영하며 정말 타이트하게 스케줄을 운용해야 했다. 영화연출에 있어서 마법의 순간은 촬영날 현장에서 배우와 나누는 교감에 있다. 그런 교감으로부터 내가 구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이번 영화에선 여유분의 컷을 찍을 상황이 안되었다. 현장에 가면 모든 걸 세팅한 채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그건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었다.
-당신이 시나리오 공동작업을 했던 <블러드 타이>의 감독 기욤 카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임스 그레이의 시나리오는 어떤 장면도 그 이후 장면의 원인이 된다고. 기욤은 이러한 당신 시나리오의 특성을 ‘pay-off’(무엇을 되갚을 때 쓰는 표현)라고 정의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게 언제나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는 거다.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단순함과 아름다움, 긴장감과 우아함을 유지하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어느 날 일어나서 ‘위대한 시나리오를 쓰겠어!’라고 다짐하면 당신은 절대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할 거다. 오히려 ‘어떤 영화를 만들까. 5개의 구조를 갖춘 3시간짜리 영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10분가량의 시퀀스를 생각한 뒤, 그 다음 작업으로 또 다른 10분의 시퀀스를 구상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시나리오 집필의 모든 과정은 연속적으로 긴장감있게 쌓아나가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캐릭터로부터 시작되고, 이 캐릭터에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의 구조를 만드는 방식이다.
-차기작으로는 어떤 작품을 생각하고 있나.
=SF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SF답지 않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라 나에게는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 같다. SF영화를 보며 보통 시각적으로 압도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 장르에서 놀라움은 시각적으로가 아니라 컨셉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미 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인들의 감정적인 면까지 훈련시킨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매년 깊은 우주로 떠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우주에서 보내며 정신 쇠약을 겪는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우주에서 진행되는 매우 리얼한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