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이 2013년 작품이라서 다행이다.” <변호인>의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배우 송강호는 이렇게 말했다. 2014년 새로운 출발을 앞둔 한국영화 주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사극, 사극, 또 사극이다. 메이저 배급사의 작품을 비롯해 주요 제작사들의 2014년 라인업에는 공통적으로 ‘사극’이라는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 <최종병기 활>의 김한민 감독과 배우 최민식이 만난 <명량-회오리바다>, 배우 하정우와 강동원이 검을 맞댈 <군도: 민란의 시대>, 이병헌과 전도연의 강렬한 드라마가 녹아들 무협 영화 <협녀: 칼의 기억>, 현빈의 군 제대 뒤 첫 스크린 복귀작인 <역린>과 이석훈 감독의 해양 어드벤처물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그리고 하지원과 손가인, 강예원 이 세 여배우의 호흡이 기대되는 <조선미녀삼총사>까지, 내년 한해 동안 한국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길 것으로 예상되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사극영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2014년의 한국영화 지형도를 그려보기 전에 역사서적부터 들춰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사극 열풍’이 새해를 앞둔 충무로를 잠식하고 있다.
아이템의 기획, 개발부터 본격적인 제작 단계까지,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데 보통 2~3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사극 열풍은 지난 2012년 즈음부터 서서히 ‘계획’되어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당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던 사극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년 하반기 방영)와 <해를 품은 달>(2012년 상반기 방영), 그리고 1230만 관객을 돌파한 2012년의 사극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흥행이 충무로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걸까? 그 영향력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극 장르의 영화를 통해 ‘뿌린 만큼 거둘 수 있다’는 희망이 일련의 사극 히트작들을 통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극이 아무래도 세트나 의상 등의 제작 규모가 있다보니 예산이 많이 소요된다.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제작비 대비 수익 면에서 사극영화 제작이 불리하다고 보는 시선이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사극영화와 드라마들이 대중에게 사랑받으며 역사물이 흥행 면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의 말이다. 한편 사극 장르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매력이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어필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었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시나리오와 제작을 맡은 하리마오픽쳐스의 천성일 대표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서 모티브를 찾더라도, 거기에 ‘팩션’이란 설정을 덧붙이면 얼마든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사극의 매력으로 꼽는다. 더불어 사극의 상상력을 뒷받침해줄 CG 기술의 진보, 규모의 예산을 운용하는 제작진의 노하우 구축 등이 충무로의 사극영화 제작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유야 어떻든, 관객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사극영화를 관람하기에 참 좋은 시절이다. 이제 2014년 함께 자웅을 겨룰 사극 주자들을 만나볼 차례다.
먼저 바다에서 맞붙는 두편의 사극 블록버스터가 있다. 2014년 여름 개봉예정인 김한민 감독의 <명량-회오리바다>(이하 <명량>)와 이석훈 감독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이다. 그동안 이 두 작품처럼 바다를 주무대로 삼은 사극 대작이 없었다는 점에서 두편의 영화가 보여줄 비주얼의 면모가 큰 기대를 불러모으고 있다. 그러나 <명량>과 <해적>은, 해양 사극 블록버스터라는 공통점 외에는 영화의 장르와 정서, 지향점에 있어서 갈 길이 너무나도 다른 작품이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그의 전작 <최종병기 활>처럼 진중한 인물과 속도감 넘치는 액션을 장전한 영화다. TV와 소설의 인기 캐릭터였던 이순신 장군을 40여년 만에 스크린으로 ‘소환’한 이 작품은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치르기까지의 3박4일을 조명한다. 12척 대 133척. 계란으로 바위를 부숴야 하는 일생일대의 전투를 앞두고 누구보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웠을 이순신의 내면을 담아낼 배우가 최민식이라는 점이 <명량>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반면 <해적>은 좀더 밝은 톤의 영화이며 판타지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조선의 정통성을 입증할 국새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다. 드넓은 바다로 사라진 고래를 잡지 못하면 토벌당할 위기에 처한 산적과 해적이 국새를 찾아 바다로 떠나며 벌어지는 소동극이 <해적>의 주요 내용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같은 할리우드 해양블록버스터영화들이 <해적>의 중요한 레퍼런스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판타지적인 밑그림을 짐작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될 거다.
윤종빈 감독의 첫 사극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는 ‘무리를 지어다니는 도둑’(군도)이라는 제목의 뜻처럼 조선 철종 시기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의적 집단을 조명할 예정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수많은 ‘나쁜 놈들’을 통해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데 그 장기가 있음을 입증한 윤종빈 감독인 만큼 배우 하정우를 비롯해 이경영, 조진웅, 마동석, 이성민, 윤지혜 등이 속한 의적단 단원들이 어떤 조화를 이룰지 궁금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둘러싼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배우 하정우와 강동원의 대결이다. 백정 돌무치(하정우)와 지방 토호의 아들 조윤(강동원). 조윤에게 복수하겠다는 돌무치의 소망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지금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궤적을 이어가고 있는 두 남자배우의 존재감만으로도 <군도>는 기대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영화다.
여성을 중심에 둔 <협녀><조선미녀삼총사>도 주목
‘남자영화 전성시대’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부재했던 2013년의 아쉬움을 채워줄 두편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다. 박흥식 감독의 무협 사극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과 박제현 감독의 <조선미녀삼총사>다. 먼저 박흥식 감독의 <협녀>는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드라마와 액션이밀접하게 얽혀 있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이병헌)가, 대의가 실현되려는 순간 사형(배수빈)을 배신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 사건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여자(전도연)는 “너는, 아니 너와 나는 홍이 손에 죽는다”는 살인예고를 남긴 채 남자의 딸 홍이를 데리고 사라진다. “두명의 여자가 한명의 남자를 죽여서 복수해야 한다. 그런데 그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이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다.”(박흥식 감독) 이 얼마나 잔혹한 운명인가. 인생의 수렁에 빠져 복수를 다짐하는 여인을 배우 전도연이 연기하고, 죽어야만 그녀와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남자는 이병헌의 몫이다. 박제현 감독의 <조선미녀삼총사>는 ‘코믹 액션 사극’을 표방하는 영화다. 조선시대 여성 현상금 사냥꾼들에 관한 이 영화는 하지원, 손가인, 강예원으로 이어지는 세 여배우의 호흡이 궁금한 작품이다. ‘십자경을 찾으라’는 왕의 밀명을 받은 세명의 여성 사냥꾼들이 요요, 쌍절곤, 봉을 들고 조선의 곳곳을 누비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역린>은 현빈의 스크린 복귀작이자 오랫동안 드라마 PD로 활동해왔던 이재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다. 즉위 1년 만에 암살 위협에 처한 정조가 수사를 지시하고, 그를 암살하려는 자와 살리려는 환관의 운명이 엇갈린다. 드라마와 영화가 꾸준히 사랑해왔던 왕 정조를 “실제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로 그려냈다는 이재규 감독의 첫 영화와 정조 캐릭터를 통해 “섬세한 외면과 그 안의 엄청난 남성성”(이재규 감독)을 함께 보여줄 현빈의 변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