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서’(晝耕夜書)라고나 할까. 소설가 곽재식은 전업작가가 아니다. 그는 한 화학 회사에서 행정 관리직으로 일하는 회사원이다. 종종 연구원이기도 하다. 인터뷰 시간을 평일 점심으로, 장소를 자신의 회사 근처로 정한 것도 그가 회사원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회사원이었다가 밤이 되면 작가로 변신하는 셈인데 정작 곽 작가는 이 사실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님들도 생계를 꾸리기 위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나. 회사에서도 소설 쓰는 사실을 아냐고? 알다마다. ‘곽재식 사원에게 배우는 글 쓰는 법’ 같은 사내 행사가 열린 적도 있다. (웃음)” 마땅한 취미가 없어 회사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게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힘들진 않다고 하니 소설 쓰기를 진정 즐기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빌딩숲이 가득한 선릉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장 차림의 그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상냥한 수다쟁이 아저씨였다. 이야기가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고, 평범한 일상을 재미있게 묘사해 지루할 새가 없는 그의 소설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가령, 단편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에 실린 <달과 육백만 달러>는 결혼을 앞둔 주인공 남자에게 옛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딸이 갑자기 나타나자, 딸과 함께 이국땅에 있는 그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옛 여자친구를 만나기까지 숱한 장애물이 펼쳐지는데 꽤 감칠맛이 난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는 결혼식을 2주 앞두고 미국에 출장 간 주인공 연구원이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면서 귀국 비행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되면서 시작되는 황당한 이야기다. 연구원은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오는 비행 일정이 불가능해지자 유럽으로 방향을 틀어 중국으로 간 뒤 베이징에서 출발해 평양을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특급열차를 타는 방법을 택한다. 신랑이 없어 결혼식이 취소되면 안 된다는 불안감 속에서 주인공이 결혼하기 위해 지구 한 바퀴를 도는데 그 모험담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떠올리게 할 만큼 긴장감이 넘치고 신난다.
이처럼 고등학생 때부터 취미로 써왔던 그의 소설들은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화수분 같다. 그의 재기발랄한 이야기에 매료돼 인터넷 커뮤니티 ‘듀나의 영화낙서판’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단편들을 모아 <곽재식 단편선>을 출간하기도 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32호에 발표한, 연구원들의 현실을 그린 소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은 MBC 베스트극장에서 <토끼의 아리아>라는 제목의 드라마로 각색되기도 했다. 가끔 영화사들로부터 영화화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에 실린 한 단편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진 않았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아무래도 소설과 영화의 차이인 것 같은데, 영화는 한줄로 요약이 가능해야 하는데 대체로 내 단편들은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애매한 성격의 이야기들이라 그런 것 같다.”
그의 소설은 대체로 허무맹랑한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아 빠져들기가 쉽다는 게 특징이자 매력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뇌가 손상돼 뇌의 일부분을 각기 다른 두개의 신체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 주인공 남자가 옛 연인을 만나러 간다거나(<그녀를 만나다>),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주인공이 우주에서 표류하게 되는, <마션>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도 범상치 않다. 그런 이야기도 평범한 일상처럼 묘사된다. 특히, <그녀를 만나다> <독심술> <최후의 마지막 결말의 끝> 같은 초기작들은 1인칭 화법으로 풀어나가는 까닭에 읽는 데 큰 부담감이 없다. “신기술의 발견 때문에 발생하는 신비로운 이야기에 처하는 평범한 주인공에게 교감하게 하려고 1인칭 화법을 즐겨 썼다.” 물론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직접 경험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에 반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쓰고 싶을 때도 있긴 한데 직접 경험에서 출발하면 자신의 마음을 옹호하듯이 쓰게 된다. 그러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영화나 다른 소설에서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 단편 <열어보면 안됨>이 ‘맥거핀’(앨프리드 히치콕이 고안한 극적 장치를 말한다.-편집자)이라는 개념만으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하고, 장편소설 <역적전>이 평소 관심 있는 역사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듯이 말이다.
이야기꾼으로서 곽재식 작가는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장르가 더 많다. 추리범죄소설이 그중 하나다. 최근 그는 미스터리 전문 격월간 잡지 <미스테리아> 2, 3호에 <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와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를 각각 썼다.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 장르처럼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하고 비정하면서도 대사 한마디가 웃긴 구석이 많은 분위기를 갖춘 이야기를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 1940년대 해방 직전 서울의 혼란상을 그린 추리소설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팬들로부터 선물받았다는 수첩에 빼곡히 적힌 아이디어들을 보니 조만간 근사한 추리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 인생의 영화
<최가박당>
“팟캐스트 방송 <곽재식 작가의 노가리 가시에 찔려 아픈 순간 생각난 그 영화>에서 자발적으로 두번 이상 감상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가장 많이 봤던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다양한 장르가 담긴 영화였던 까닭에 어떨 때는 전쟁물 같았고, 또 어떨 때는 로맨스영화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되게 감동을 받았던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번째 봤을 때가 더 감동적이었고, 볼 때마다 감탄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진짜 내 인생의 영화는 <최가박당> 시리즈였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적극 추천할 만큼 작품성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살면서 자꾸 생각나고, 자주 봤던 것 같다.”
<씨네 21> pick
<역적전>
<역적전>은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침입 때문에 고난을 겪은 신라, 백제, 가야 3국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승자를 조명하는 보통 영웅담과 달리 이 소설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제 남자 사가노와 가락국 여자 출랑랑이 주인공이다. 실제 인물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상을 꼼꼼하게 고증했고, 캐릭터가 개성 있는 까닭에 마치 실제 인물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또, 이야기가 활극이라 무협지처럼 긴장감이 넘쳐 TV시리즈 이야기로도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