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향하는 문학은 바로 ‘항문발모형’(肛門發毛形) 문학이다.” 지난 2010년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등단할 당시, 최민석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항문발모형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독자들이) 울다가 웃어서 엉덩이에 털이 나는 작품을 써보겠다는 작가의 굳은 의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물론 그의 글을 읽고 정말로 그곳에 털이 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독자를 울다가 웃게 하겠다는 최민석 작가의 선언은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꽤 성실하게 지켜져왔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최민석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유머와 페이소스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연스러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능력자>의 두 주인공, 미치광이 전직 복서 공평수와 ‘청순문학’을 꿈꾸지만 현실은 야설작가인 남루한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질하고 웃음을 자아내는 인물이지만 “너절해져도 찢어지진 않는다”는 그들의 결기 앞에서는 가슴 한켠이 뭉클해진다. 한편 <풍의 역사>는 전장에서 라이언 일병을 만나고 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독일의 법학자 에른스트 볼프강 뵈켄푀르데와 미국의 솔 가수 레이 찰스와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를 형제처럼 여겼”던 남자(허풍)와 그의 아들(허구), 손자(허언)의 일대기를 다룬다. 얼핏 헛웃음이 나오는 허무맹랑한 영웅담처럼 보이나 “제국주의, 서구 열강, 독재와 같은, 개인을 누르는 무거운 이념의 언어들”로부터 해방된 최민석의 소설 속 인물들은 단지 웃음을 위한 웃음이 아닌, “무거움에 대한 저항”(강유정 문학평론가)으로서의 웃음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쟁취해낸다.
최민석 작가는 그의 소설이 논문과 영화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부연설명이 좀 필요하다. “중•고등학생 때 받은 용돈은 영화 티켓을 사고 비디오를 빌리는 데 거의 다 쏟아부었다”고 말하는 그의 꿈은 본래 영화감독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진로를 돌려야 했던 그는 영화과와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고, 한때 기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최민석 작가가 처음으로 “제대로 써본” 글이 바로 대학원에서 쓴 석사 논문이었다. “긴 글을 어떻게 써나갈지 구성하고 논리성을 갖추는 건 논문 쓸 때 배웠다. 내가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쓰는데, 황당할수록 논리성을 갖춰야 최소한의 납득이 가능하지 않겠나. 서사의 전개나 스타일은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처럼 인내심이 떨어지는 독자들이 글을 읽으려면, 한번 잡으면 끝까지 놓지 않을 만큼 재미있고 빨리 읽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읽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되는 기존 소설의 문법보다는 흡입력 있는 영화의 전개 방식이 나에게는 더 도움이 된 것 같다.” 데이비드 O. 러셀의 영화 <파이터>로부터 <능력자>의, 팀 버튼의 <빅 피쉬>로부터 <풍의 역사>의 모티브를 얻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처럼 소설보다 영화에 심정적으로 가까웠던 최민석 작가에게, 소설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돈을 모으는 일보다는 나눠주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 3년간 국제구호기관에서 일하던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회사를 그만둔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퇴직금을 계산해보니 8개월을 버틸 수 있었고, 그동안에 작가로 데뷔하지 못하면 다시 구직활동을 시작할 참이었지만 단편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가 창비 신인문학상에 선정되며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끈 이 소설이 영화와의 연결고리도 되찾아줬다는 점이다. “유비유필름의 노봉조 대표님이 <능력자>를 읽은 뒤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그런데 나를 만나기 전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읽고 이 작품을 더 마음에 들어 하셨다. 버스가 배경이니 돈도 안 들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영화라서 좋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판권 계약을 맺고 시나리오도 직접 썼는데…. 영화 작업은 처음이라 시나리오에 하고 싶은 걸 다 넣었다. 미국영화식 유머, 정치 얘기, 풍자가 다 들어 있다. 기법이라는 기법도 다 넣었다. 롱테이크 신도 넣고, 카메라가 우주까지 갔다가 스윽 빠지는 장면도 넣었다. 나중엔 인도영화처럼 다같이 군무로 춤추는 장면도 있다. 대표님이 한국영화를 이렇게 만드는 건 힘들겠다고 하시더라. (웃음)” 외국인 노동자들이 관광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한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우주까지 뻗어나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영역으로 첫발을 내딛은 최민석 작가의 상상력이 장편 분량의 시나리오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었을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최근 최민석 작가는 내년 초 발간 예정인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이라는 엽편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A4용지 한두장 분량의 소설을 50여편 이상 묶은 모음집이란다. “칼럼이든 에세이든 여행기든 소설이든, 평소에 글쓰기 훈련을 많이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격 훈련을 많이 한 타자들은 불시에 공이 오더라도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다고 하잖나. 살아보니 뜻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쌓아놓은 것들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있다.” 도쿄의 외로운 한인 탐정과 비밀스러운 보육원 남매, 미시시피의 모기떼와 세기말의 좀비들. 최민석 작가가 성실한 훈련으로 쌓아올린 이 상상의 편린들이 독자와 만나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내 인생의 영화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을 갖춘 영화다. 한 인간이 속할 수 있는 범위의 집단을 생각해보자면 가장 큰 범위로는 국가가 있을 테고, 그다음이 가족, 최소 단위가 개인일 거다. 이 모든 집단의 운명과 애환이 맞물려 있는 영화가 바로 <그을린 사랑>이다. 오이디푸스적인 테마, 모든 장면들이 이후의 이야기를 위한 단서로 기능하는 미스터리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좋고, 과하지 않은 대사도 마음에 든다.”
<씨네 21> pick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
“나 자신과 B급 취향 독자들을 위해 매주 1편씩 에세이를 홈페이지에 올리겠다.” 5년 전 최민석 작가는 이렇게 선언했고 정말로 2년 동안 금요일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에세이를 한편씩 올렸다. 이 작품은 그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현재 이 에세이집은 절판되고 “강남 교보문고에 1권이 남아 있는” 상황이지만 최민석 작가가 이 책을 가장 아끼는 건 “데뷔하기 전의 인생이 모두 녹아 있으며”, “가장 아이디어가 좋고 재기발랄했던 시기”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원래 영화감독이든 작가든, 가장 처음에 만든 작품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직업적 궤도에 오르면 훈련한 걸 반복적으로 쓰게 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에세이집을 반드시 복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