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중력에서 이탈하기
2015-12-15
글 : 이예지
사진 : 오계옥
손보미

‘내가 중력을 이기고 날아오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폭우> 중)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 (<과학자의 사랑> 중) 손보미 작가가 어느 날 꾼 꿈에서 출발한 두 갈래의 작품은 각각의 인물을 통해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은 개별 서사의 중력에서 벗어나 대화를 건네고,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리듬을 그려넣는다. 그녀의 소설은 한국 문단에서 단연 보기 드문 개성을 지녔다. 등단 후 한권의 단편집을 냈을 뿐이지만, 2012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2013년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1년, 아들을 잃은 남자와 그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가를 그려낸 단편 <담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치 <담요> 속 작가와도 같은 포즈를 취한다. 그녀는 미국 드라마 <오피스>의 등장인물 마이클 스캇의 말을 빌린다. “우주에 어떤 망원경이 있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덜 외로워진다, 라는 대사가 있다. 나는 그 망원경으로 어떤 사람을 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어딘가에 실제로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구현해내는 세계는 지역성이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공간에서 지극히 사실적으로 기술되고, 기묘한 현실감을 준다. 그녀는 독자들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모를 혼란을 겪도록 만든다. 그녀는 작고한 감독과 그의 유작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그들에게 린디합을>에서 “길 감독과 임안나를 실존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자신의 이름인 손보미를 영화기자로 등장시키고, 실제 같은 기사문과 평론, 인터뷰를 서사 안팎에 배치했다. “한편의 소설같이 쓰인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소설도 이렇게 기사문처럼 쓸 수 있겠다 싶었다.” 동시에 그녀는, 망원경과 인물 사이의 간격처럼 인물의 속내에 쉽게 접근하지 않고 거리감을 유지한다. “거리를 두고 봤을 때 볼 수 있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심리묘사보다 행동을 서술하며 서사를 전개하는 방법론은 영미권 문학과도 맥을 같이한다. “최소한의 단어와 행동으로 상황을 보여주는 미니멀리즘”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서 배웠고, 사건 위주의 전개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존 치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손보미 작가의 작품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작품들을 잇는 평행 우주다. <담요>에서 장의 죽은 아들은 <애드벌룬>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장이 담요를 건네준 젊은 부부는 <산책>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나오는 영화 <달콤한 잠>은 <달콤한 잠-팽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단편으로 쓰였다. 독립적인 단편들 사이에서 이어지는 리듬은 다른 의미를 지닌 타로카드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펼쳐내는 것처럼 그녀의 작품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녀는 “망원경으로 본 사람들을 한 마을에 모아” 작품 사이 다리를 놓고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린다. <담요>로 시작해 <애드벌룬>으로 끝나는 책의 구성은 평행 우주를 열고 닫는 형태다. “세계관을 잘 보여줄 수 있게 배치했다. 책을 덮을 때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느껴졌으면 했다”고 말한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잊지 않는다.

인물과 세계를 응시하는 동시에 관조하는 그녀는 정작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 정의한다. “습작 시절부터 1인칭 소설을 잘 안 썼다. 스스로의 경험을 소설화할 만큼 특별한 경험이나 특이한 삶의 이력 같은 게 없으니.” 단지 많이 읽고, 많이 봤다. 어릴 적부터 지구공동체설 등을 다룬 미스터리 문고를 섭렵했고, 고등학생 때는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 등을 탐독하며 만화 스토리작가를 꿈꿨고, 국문과에 진학해선 국내외 작가들의 소설을, 방황하던 이십대 중•후반에는 무수한 영화와 미국 드라마들을 봤다. “너무 평범해 작가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그녀는 국문과의 글 쓰는 분위기에 익숙해져 창작 동아리에 들어갔고, 습작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번 쓰기 시작하니 재미가 붙었다. 대학원에 진학해 앞날을 고민하던 시절, “정면 돌파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응모한 두 번째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결과를 얻었다. 손보미 작가는 현재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로렌>을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 중이다. “2000년대 초반 브랜드 ‘랄프로렌’이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십대를 보낸 남자가 미국 유학 중 방황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긴 서사를 압축해 단편에 담아내곤 했던 그녀는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풀어놓는 게 아직 익숙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추리소설이나 탐정물에 도전해보고 싶다. 누아르는 단편으로 한번 써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더라.” 손보미 작가가 아직 선보이지 않은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매 작품 중력을 이탈하며, 가보지 못한 세계와 보지 못했던 인물을 담담히 살피는 그녀의 다음 책장이 궁금하다.

<커피와 담배>

내 인생의 영화

<커피와 담배>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는 11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노 프라블럼> <샴페인> 그리고 <르네>. <르네>는 두명이 만나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보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문이 딸랑거릴 때마다 누가 등장할 것 같고, 잡지는 알고 보니 총기 잡지라는 식으로 긴장을 형성한다. 한정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최소한의 것들만 보여주면서, 등장인물들이 그 이면에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다. 아주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인물이 살아온 인생의 질감을 보여준달까. 미니멀리즘을 훌륭하게 선보이는 영화다.”

<씨네 21> pick

<그들에게 린디합을> 중 <담요>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 <담요>를 비롯해 문학동네 제3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폭우> 등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손보미의 첫 소설집. 독립적인 단편들은 각각의 등장인물을 교차하기도, 평행 우주를 그리기도 하며 손보미만의 세계를 교직해낸다. 아들이 죽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담요>로 시작해, 그 아들이 살아남은 평행 우주의 이야기를 그린 <애드벌룬>으로 맺는 수미상관의 구성이다. 손보미 작가는 “<담요>는 다른 소설을 쓸 수 있게 해준 작품이니 내게는 가장 중요한 작품인 셈”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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