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를 빌려드릴까요?” 녹음기를 켜자 김태용 작가가 소형 마이크를 건넨다. 주변의 소음을 잡아주고 스마트폰에도 호환 가능한, 녹음에 유용한 물건이란다. 김태용 작가는 소리를 채집한다. 독특한 억양을 지닌 사람의 목소리,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 물소리. 일상적인 순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예전부터 문학의 음성적 역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첫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낸 뒤 사운드아티스트 유한길씨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음성적’인 소설을 한국에서 보게 되어 흥미롭다고 하더라. 그 뒤로 유한길씨의 제안으로 사운드텍스트그룹 A.Typist에 참여해 소리에 대한 작업을 함께해왔다. 사운드아트를 하는 친구들과 일하며 소리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주변에 떠도는 잡음, ‘화이트 노이즈’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소리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고 어디서부터 이 소리들이 반복되고 들려오는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김태용 작가의 소설을 볼 때면 어쩐지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싶다. 각종 의성어와 의태어, 독특한 어감의 단어들, 관습적이지 않은 조합으로 완성된 문장들은 소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때때로 이 청각적인 문장은 소설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서사를 이끌기도 한다. 일례로 김태용 작가의 단편소설 <포주 이야기>는 “나는 포주였다”라는 문장이 마치 하나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작품이다. 이 문장은 어느 늙은 포주가 자신의 유서를 쓰기 위해 선택한 첫 문장이기도 하고, 그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해 끊임없이 되뇌는 말이기도 하며, 그의 직업을 일컫는 문장이자 후회 섞인 탄식의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포주였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말이 너무 좋아 반복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중심에 놓고 생각을 전개시켜나가며 쓴 작품이 바로 <포주 이야기>다. 다른 작품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음성적으로 들었을 때 좋은 말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말을 첫 문장으로 놓고 집필을 시작한다. 중반 정도 썼을 때 비로소 등장인물과 결말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제까지 내가 쓴 모든 소설은 어떻게 보면 소설 쓰기의 과정에 대한 글이다.” 다시 말해 김태용 작가의 작품에서는 말의 의미보다 감각이 우선한다. 서사의 완결성이나 개연성에 개의치 않고 반복과 실험을 통해 언어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그의 문장은 시와 닮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그는 자끄 드뉘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와 <벌거숭이들>,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와 <포주 이야기>등을 통해 한국문학에 새로운 소설의 형식을 제시해왔다는 평가를 받은 김태용 작가는 최근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계간 문예지 <한국문학> 2015년 여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차이밍량의 밤>은 그 변화의 전조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3권의 소설책과 1권의 시집을 냈고 1편의 영화를 말아먹었다”고 말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은 차이밍량이다(우리가 생각하는 그 차이밍량이 맞다). 그의 영화 속 이강생처럼, 과묵하고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며 종종 엉뚱하기도 한 (자칭)차이밍량은 어느 날 밤 3명의 여인을 만나고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 소설의 말미에는 차이밍량의 눈앞에 홍상수가 나타나 함께 시네마테크에서 열리는 버스터 키튼 영화제를 보러 가기로 약속하는 놀라운 순간도 장전되어 있다.
김태용 작가에게 <차이밍량의 밤>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일종의 커밍아웃 같은 작품이다. 그는 20대 시절 불법 비디오를 복사해서 판매하는 일을 했었고, 천리안 영퀴방에서 ‘린치밥’이라는 아이디로 활동했던 시네필이었다. 그런 그가 문학을 선택한 건 그때만 해도 영화는 공동 작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대학 시절 계속 들었던 지적이 너는 너무 영화적으로 글을 쓴다는 거였다. 그 말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2년 동안 작정하고 극장에 안 갔다. 앞으로는 절대 영화화되지 않을 법한 소설을 쓰겠다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건 영화다. 내 소설이 반서사적이고,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평가에 좀 화가 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더라. 본격적으로 내가 좋아했던 영화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차이밍량의 밤>이다.” 이 소설을 시작으로 문학적인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사랑했던 존재들을 소설을 통해 호명하고 싶다는 김태용 작가의 차기작에는 어떤 이름들이 담겨 있을까. 아마도 ‘차이밍량’만큼이나 부드럽고 인상적인 어감의 소유자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내 인생의 영화
<언어와의 작별>
“영화잡지와 인터뷰라 이 질문은 반드시 물어볼 줄 알았다.(웃음) 지난 1년간 봤던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만 뽑아왔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도 좋았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와 <인히어런트 바이스>도 좋았지만 최고는 장 뤽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이었다. 3D라는 첨단의 형식을 활용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모든 내레이션은 오래된 문학작품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렇게 가장 첨단의 기법으로 가장 고전적인 것들에 대한 애정의 표현을 한다는 게 흥미로우면서도 애상적이었다.”
<씨네 21> pick
<차이밍량의 밤>
“우리들이 오염시킨 문학이 영화를 오염시키고 다시 영화가 문학을 오염시키고, 영화에 오염된 문학이 우리를 오염시키고 있는 거야.” <차이밍량의 밤>(줄거리와 정보는 본문 참조)에서 반복 변주되는 이 핵심적인 문장은 김태용 작가가 최근 가장 치열하게 하고 있는 생각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로베르 브레송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온순한 여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화 <부드러운 여인>을 만들었듯” 영화와 문학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전한다. ‘오염’이라는 단어는 “좋은 질병처럼 퍼진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김태용 작가는 말했다. <차이밍량의 밤>은 2016년 단편소설집으로 발행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