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편집술의 줄다리기
2015-12-15
글 : 윤혜지
사진 : 오계옥
장강명

장강명은 겨루기에 능한 작가다. “신념이나 지향과 무관하게 도구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문자는 감각을 이용하지 않는 비교적 빈약한 도구다. 도구가 빈약한 만큼 그것만으로 사람을 끌어당겨 책 한권을 다 읽게 만들고, 떠나는 순간 한방 남기고 싶은 것 또한 작가의 욕망일 거다.” 장강명의 소설을 읽는 일은 비유하자면 줄다리기 같다. 줄이 하나 있다. 독자가 한쪽을 잡고 작가가 한쪽을 잡는다. 당긴다. 작가는 힘껏 줄을 당기다 가끔 슬쩍 힘을 푼다. 가벼운 마음으로 줄을 잡았던 독자는 점점 작가를 이기고 싶어져 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작가가 줄을 탁 놓아버리고 독자는 망연히 줄과 작가를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장강명의 소설을 읽고 난 대개의 독자가 그런 기분이었을 거다. 요는 “제일 해답이 궁금한 시점에서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네가 가진 것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열광금지, 에바로드>). 그리고 비범한 여자가 자신에게 매혹된 이들에게 “자살 선언”을 설파한 뒤 암호가 걸린 문서 파일을 유서로 남기고 단숨에 죽어버린 것처럼(<표백>). “소설에선 극단적인 주장을 몰아붙이지만 정작 나는 어디에도 잘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다. 내심 안정된 사람이라 그런 주장이 가능한 것 같다.” 휘둘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뚝심은 오랜 시간 기자로 일했던 경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의에 맞는 소재, 간결한 문장, 취재에 바탕한 상세한 묘사, 기승전결이 명확한 구성은 장강명 소설의 공통된 특징이다. 장강명은 공학을 전공한 뒤 한동안 건설회사에 근무했고, “글을 쓰고 싶어”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 사회부, 산업부를 차례로 거치며 11년간 기자로 살았다. 대학에 다니던 도중 SF소설 <클론 프로젝트>를 출간하기도 했다. 장강명은 소설가에게도 필요한 몇 가지 기술들, 기획과 배치, 취재와 마감의 도를 긴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훈련한 셈이다. 소설가로 전업하고 난 뒤 취재가 더욱 쉬워졌다며 그는 웃었다. “기자라고 할 땐 사람들이 절로 입을 다물었는데, 소설가라고 하니 거부감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더라.” 내용과 크게 상관없는 고유명사나 사실관계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고도 했다. 기획 기사를 쓰던 때의 습관이 남아 미리 구조를 짜놓고 글을 쓰는 경우도 많다.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가 대표적이다. “구상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쓰면서 탄력받기도 좋고, 쓰다 헤매지도 않게 된다. 장편을 쓰다보면 총체적으로 힘이 부칠 때가 오는데 난관을 넘기도 쉽다. 여기서 당장 막혀도 다음 고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내가 있는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장강명식 줄다리기의 가장 절묘한 수는 “편집술”이다. “시청각적 묘사가 화려한 소설보다 편집을 시도한 소설이 더 영화적이라 생각한다”는 그의 말대로 장강명의 소설은 대개 시간과 공간을 제멋대로 넘나든다. 단편적으로 알게 된 정보를 모아 머릿속에서 재조립하며 읽어야 하는데, 영상 문법에 익숙한 지금의 독자들이라면 이곳저곳을 숱하게 오가도 전부 따라오리라고 장강명은 믿는다. 간편하게는 호주 유학기를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는 <한국이 싫어서>나 인터뷰와 회고를 교차로 소개하는 <댓글부대>의 서술 형태가 그렇다. 더 나아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파편처럼 늘어놓는다. 순서를 뒤섞어놓은 것이 아니라 “마구 가위질을 해서” 흩어놓은 것이다. 기억은 세 사람을 떠나 처음과 끝을 재구성한다. 초반부만 읽은 독자라면 이야기를 하나로 잇기에 퍽 고될 것이다. “영화를 거의 안 보는 편이지만 초반부 30분만 봐서는 나중을 짐작할 수 없게 되는 양이 어쩌면 가이 리치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이 아니겠느냐”고 눙쳤지만 그의 소설이 영화화하기에 손쉬운 텍스트는 아닐 것 같다. 영상이 흘러넘치는 이런 시대에도 “서사로서 소설이 갖는 경쟁력을 더 신뢰한다”는 장강명은 자신의 업이 소설(만)을 쓰는 일이라 단언하는 신실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영화화에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다른 매체로의 확장 가능성보다 그에게 앞서는 건 좋은 소설을 쓰겠다는 일념이다. SF소설 <호모도미난스>는 이미 국내 모 영화사와 영화화 판권 계약을 맺고 시나리오로 고치는 중이다. <한국이 싫어서>도 여러 군데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독자의 선호도가 가장 높을 판을 찾아 YES24 블로그에 연재한 좀비 스릴러 <눈덕서니가 온다>도 한 차례 영화사에 들어간 적은 있으나 답이 돌아오지 않아 출판 계약을 맺고 출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지금 장강명은 “회심의 작품”을 쓰고 있다. 남북관계를 다루는 SF스릴러로, 지금껏 그가 해보지 않은 형태의 작법을 시도하겠다고 한다. 논픽션 1편도 내년 가을에 출간할 계획으로 함께 쓰고 있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할 <눈덕서니가 온다>,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에 들어갈 SF소설, 한겨레출판에서 내놓을 에세이집까지 내년 초에 적어도 3권 이상의 단행본이 나올 예정이다. “한권 한권이 새 도구를 갈고닦는 작업이었다. 지금 쓰는 SF스릴러는 작법을 달리해볼 생각에 힘들게 진행 중이다. 칼 한 자루로 베기 연습만 하던 사람이 단검을 휘두르고 있는 기분이다. 얼른 달인이 되어서 도구 탓하지 않고 마구 휘둘러보고 싶다. (웃음)”

<레이더스>

내 인생의 영화

<레이더스>

“편협하게도 SF영화만 보는데 마블 스튜디오 영화는 다 챙겨봤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가 으뜸이더라. 캡틴 아메리카, 이 정직한 남자는 <다크 나이트>(2008)의 배트맨과 같은 존재론적 고민을 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끝날 것 같아 무척 기대된다. 하지만 정작 스무번도 넘게 돌려본, ‘내 인생의 영화’는 <레이더스>다. 정직함과는 거리가 먼 도굴꾼 아저씨가 제3세계에서 백인우월주의를 펼치는 영화. (웃음) 뭐라고 해야 할까. 재미있다. 아무 구간이나 선택해서 봐도 다 재미있다. 1988년인가 89년인가, 학교에서 인근 여고에 있는 극장으로 우르르 애들을 데려가 <레이더스>를 보여줬다. 멋진 남자, 예쁜 누나, 스펙터클한 모험. 모든 게 내겐 처음이었는데 그 기억이 몹시 강렬했던 것 같다.”

<씨네 21> pick

<댓글부대>

2012년 발생한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쓴 소설이다. ‘팀-알렙’의 멤버 삼궁, 찻탓캇, 01査10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이를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한다. 소설은 찻탓캇이 진보 성향의 일간지 기자 임상진에게 팀-알렙의 행적을 고발하고 임상진이 이 내용을 기사화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찻탓캇의 인터뷰와 팀-알렙이 벌여온 사건이 교차되는 동안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며 언론과 여론을 어떤 식으로 악용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댓글부대>가 자신의 소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하다”고 자평한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 제3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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