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mm의 상상
2015-12-15
글 : 이예지
사진 : 백종헌
구병모

“망상은 누구나 하지 않나. 망상에서 1mm만 더 나아가면 상상이 된다. 상상으로 단련돼, 당장 눈앞에 아가미 달린 소년이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웃음)” 충만한 상상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작가, 구병모는 2008년 마법사가 운영하는 빵집을 배경으로 한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과 동시에 첫 책을 출간했다. “15년간 등단의 문을 두드린” 그녀는 오랜 갈증을 풀어내듯, 데뷔 후 1년에 한권 이상의 책을 탄생시켰다. 아가미가 달린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낸 <아가미>, 폐쇄적인 학교의 배후를 밝히는 <피그말리온 아이들>, 노년의 여성 킬러가 주인공인 <파과>, 그리고 단편집 <고의는 아니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과 고전동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신작 <빨간구두당>까지.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내세우는 그녀의 작품들은 “뚜렷한 캐릭터, 흥미로운 소재, 분명한 사건,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향한다. “데뷔작 이후 원래 시나리오를 썼었냐고 많이들 물어보더라.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그녀다.

9월에 출간한 <빨간구두당>을 보면 그녀의 상상력의 원천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 문고본을 비롯한 동화를 탐독했다. <소공녀>를 보면 귀족이었던 세라가 하녀가 되어 다락방에 묵으면서 난롯불, 만찬, 푹신한 침대 등을 상상해내지 않나. 나도 가정형편이 어려웠는데, 상상의 힘으로 현실을 버텨냈다. 12살 때부터 작가를 꿈꿨고, 온갖 허무맹랑한 상상들을 끄적였다.” 동화뿐 아니다. 그녀는 어린이용으로 나온 <일리아드 오디세이> <그리스 로마 신화>, 신약과 구약 등에 매혹됐다. “어린이용이어도 사건을 추리다보면 잔혹하고 선정적인 사건이 도드라지고 서사가 확실해진다.” 그녀는 영감의 원천들을 “신화, 민담, 전설을 포괄하는 설화”라고 표현한다. “설화는 서사가 강하다. 영화에서도 모티브와 서사가 뚜렷해야 관객이 많이 들지 않나. 시나리오의 기본 구조를 가르칠 때 영웅 설화 서사의 골자를 설명하듯이, 영화도 설화적인 요소가 있다.” 그녀의 소설이 영화와 맥이 닿아 있는 것은 영화 산업에서도 감지하고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북투필름’의 책으로 선정됐고, <아가미>와 <파과>는 판권이 팔렸다. “<파과>의 판권은 <뷰티 인사이드>의 조감독이었던 차수보 감독에게 있다. 지금 시나리오 단계다.”

그녀의 상상은 단순한 가상의 사건이 아니다. 장르적 색깔을 배제하고 보면,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가정에서 내몰린 소년이, <아가미>에서는 사회에서 격리된 고아 소년이, <피그말리온 아이들>에서는 구조 아래 억압받는 학생들이 있을 뿐이다. 명백히 현실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걸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크게는, 사회 중심보다 주변에 관심이 많다. 현 사회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수가 아니면 배제되는 원리다. 중심 아니면 다주변이 되지 않나. 1mm만 눈을 돌리면 남들이 외면하는 타자가 있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위저드 베이커리>를 비롯한 “꿈도 희망도 없는” 청소년 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학부모 독자들에게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다.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내용이라 비교육적이라고 하더라. 난 청소년기를 미화하거나 그들에게 교훈을 줄 생각은 없다.” 대신, 그녀는 정공법을 택한다. “속칭 ‘헬조선’이라는 사회를 보여주면서, 이런 게 현실이다. 너희는 어떻게 할래? 하고 묻는 거다. 어떤 독자들은 답까지 제시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갖겠지만, 나는 답을 내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소설을 보는 청소년의 몫이다.” 그런 그녀의 가치관이 가장 잘 담긴 작품은 그녀에게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과 황순원 신진문학상을 안긴 단편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다. “장편은 볼륨이 크니 사건 위주가 되고, 단편은 가치관, 태도, 표현 양식에 좌우되는 편이다. 전자는 장르문학적이 되고 후자는 순문학적이 되는 이유다.” 그녀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서 <어디까지를 묻다> 등의 단편을 통해 소외된 타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보낸다.

구병모 작가는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가볍게 넘나드는 행보로 문단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청소년과 성인을 넘나드는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무경계’의 작가다. “등단 전 좌절의 과정에서, 내 글이 순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순문학 단편집으로 몇개의 상을 받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의외로 평단이나 독자는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다. 다만 잘 쓰는 것이 중요하겠지. 앞으로도 장르에 대한 의식 없이 힘닿는 대로 글을 써나가고 싶다.” 그녀가 “힘닿는 대로 쓸” 차기작은 어떤 작품일까. 그녀는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를 보고 독자들은 다음 작품도 판타지이리라 기대하더라. <아가미>가 나왔을 때 역시 판타지잖아, 이런 시선이 있었고. 하지만 <파과>를 쓰자, 이 작가가 판타지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구나 하더라. 이번 작품 역시 그때처럼 독자들이 상상하기 힘든 작품이다. 내가 기존에 시도 한 적 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바라는 세상을 향해 1mm 더 몸을 뻗을 그녀의 새로운 상상을 기다린다.

<디스트릭트 9>

내 인생의 영화

<디스트릭트 9>

“<디스트릭트 9>에선 인간보다 강한 존재로 묘사되기 마련인 외계인이 역으로 박해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고정관념을 뒤집은 설정이 흥미를 자극하지 않나. 한편으론 주제와 비판의 대상도 확실하다. 이방인, 타자를 대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잔혹함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신나게 보기보단 슬프게 봤다. 주인공이 약물 부작용으로 박해하던 외계인이 되어간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흥미로운 컨셉을 갖추고 있고,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취향에 맞는 작품이다.”

<씨네 21> pick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구병모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으로,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과 황순원 신진문학상 수상작이다. 장르색이 강한 장편들과 달리 순문학 단편들로 꾸려져 있으며, 장르를 벗어나 그녀의 작가로서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관이 가장 잘 담긴 작품으로 이 책을 꼽으며, “인간이 같은 인간들에게 내쳐지고 타자 취급을 받는 건 지옥이다. 적어도 내가 그 지옥의 일부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어디까지를 묻다>에서는 카드회사 콜센터 여직원이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고, <여기 말고 거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는 정상성의 범주에 속해 있는 화자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아파트 외벽을 오르는 괴짜 친구의 삶을 바라본다. 그외에도 장르적 요소 없이 현실세계와 밀착해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에 따듯한 시선을 보내는 6편의 단편들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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