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상상력을 총동원해 함께 만들어낸 영화다.”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소개된 <블리드 포 디스>를 위해 벤 영거 감독과 배우들이 의기투합했다. 영화는 전설의 복서 비니 파시엔자의 놀라운 실화에 바탕한다. 챔피언이 된 비니 파시엔자가 교통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뒤 재기에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위플래쉬>(2014)로 한국 관객에게 잘 알려진 마일스 텔러가 집념의 사나이 비니 파시엔자를 연기해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다크 나이트>(2008), <월드 인베이젼>(2011) 등으로 중후한 매력을 더해온 에런 에크하트가 비니를 돕는 코치 케빈 루니를 맡아 극에 무게감을 더한다. <블리드 포 디스>의 감독과 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그들이 말하는 복서 비니 파시엔자의 용기와 <블리드 포 디스> 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향한 그들의 애정을 전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을 계기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걸로 안다.
=벤 영거 감독_ 여행을 많이 하지 않아 이제야 아시아에 와봤다. 오늘(10월12일) 밤 <블리드 포 디스>의 첫 상영 후 한국 관객과 만난다. 그 무엇도 예상되지 않는다. 뭘 기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한국 관객이 어떤 영화를 즐겨 보는지도 궁금하고. 얕은 지식으로는 한국 역시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면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많은 변화가 생긴 걸로 안다. <블리드 포 디스>는 복싱영화라기보다는 비니와 그의 가족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그만큼 한국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일스 텔러_ <블리드 포 디스>는 거대 스튜디오의 대규모 자본이 들어간 영화는 아니다. 복싱에 대해서라면 복싱 관련 다큐멘터리가 훨씬 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작은 예산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하며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 만든 영화다. 1980년대가 배경인 시대극이자 복서 비니의 이야기이자 그의 가족 드라마다. 지극히 보편적인 드라마로서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에런 에크하트_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언어, 국경을 초월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늘 밤 관객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 에너지를 느낄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된다. 영화제에서 <블리드 포 디스>를 초청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만듦새는 어느 정도 보장이 된 게 아니겠나. (웃음)
-벤 영거 감독은 데뷔작 <보일러 룸>(2000)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고 <프라임 러브>(2005)를 만들었다. 세 번째 장편 <블리드 포 디스>를 만들기까지는 무려 11년이 걸렸다. 긴 공백 끝에 비니 파시엔자의 이야기를 선택해 완성한 건 어떤 이유인가.
벤 영거 감독_ 두 번째 장편까지는 운이 따라줘 너무도 쉽게 영화를 만든 것 같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왔지만 결실을 맺기가 어려웠다. 주변의 동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모두가 너를 잊을 거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너에게 허락된 자리가 없게 된다’며 독려를 거듭해줬다. 사고로 재기가 불투명한 비니 파시엔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을 때 내 상황과 비슷하게 보였다. 비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비니에게 더이상 복싱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비니는 결국 재기하지 않았나. 그래서인지 더욱 이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어졌다.
-두 배우는 영화의 어떤 면에 이끌려 합류를 결심하게 됐나.
마일스 텔러_ 시나리오를 읽어본 배우라면 누구든 돈을 내고서라도 이 영화에 참여하고 싶어졌을 거다. (웃음) 그만큼 시나리오가 좋았다. 그동안 나름 여러 장르의 영화를 시도해왔지만 이번처럼 심각하고 드라마틱한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한 적은 없었다. 특히 비니는 내가 전작에서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남성적이고 강렬한 캐릭터다. 전사와도 같은 파이터의 정신을 보여준다. 항상 이런 역을 만나길 기다려왔다. 내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비니 역을 선뜻 제안해준 감독님에게 감사하다. 인물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작업이라 준비하면서도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해보지 않은 걸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즐거웠다. 복서 역이라 체중을 20kg 가까이 불리며 외형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내가 몸이 좋은 배우도 아니고 한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몸을 만들기가 쉽지 않더라. 8개월간 매일 트레이닝을 받았다. 또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찍다보니 그 지역 특유의 악센트를 구사하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시도였다. 무엇보다도 비니 파시엔자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끔 하고 싶었다.
에런 에크하트_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안타깝게도 케빈 루니는 현재 치매로 병상에 있어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비니가 항상 현장에 와서 우리를 지켜봐줬다. 비니는 자신이 <록키>(1976)를 보고 “세계 챔피언이 되고 말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더라. 이런 게 바로 영화의 힘이 아니겠나. 누군가를 고취시켜나가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말이다. 비니와 케빈의 관계에서도 그런 점이 잘 표현되길 바랐다. 마이크 타이슨의 코치이기도 했던 케빈 루니가 어떤 식으로 선수들과 교감하고 교육해나갔는지 자료 조사를 많이 했다. 복싱 선수에게 트레이너는 훈련 지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코치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됐다. 케빈도 자신의 인생에 재기를 도모해야 할 시점에 비니를 만난 셈이다. 케빈 역시 감정의 고저가 있는 인물이다. 배우에게는 최고의 역할이었다.
-마일스 텔러와 에런 에크하트는 <래빗 홀>(2010)에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다. 그 영화로 장편 데뷔를 한 마일스 텔러는 어느새 <블리드 포 디스> 등의 영화의 주연배우로 성장했다.
벤 영거 감독_ 그땐 (20대 초반의) 마일스가 사춘기 아니었나. (일동 폭소)
마일스 텔러_ 그 시절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에런은 이미 경험 많은 배우였고.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라 촬영 전부터 그와 가까워졌고 그에게 위안을 받았다. 허물없이 계속돼온 우리의 관계 덕에 이번 작업도 경계 없이 협업할 수 있었다.
에런 에크하트_ 한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가는가를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래빗 홀> 때만 해도 마일스는 갓 학교를 졸업한 신인배우였는데 이젠 한편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스타다. 영화 속 모든 배우들이 그를 받쳐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의 진화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이번 영화에 마일스가 합류한다고 했을 때 그가 얼마나 잘하는 배우인지를 아니까 내가 다 든든하더라.
-서사를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화려한 복싱 장면을 보여주기보다는 챔피언 비니의 한때, 비극적 사고, 그 후 재활의 과정을 빠르게 전개해나간다.
벤 영거 감독_ 시나리오 초고에는 비니의 교통사고가 극의 중간쯤에 배치돼 있었다. 모니터링을 해보니 사람들이 주인공이 승승장구할 때는 재밌게 몰입해서 보는데 사고 이후는 상당히 지루해하더라. (웃음) 편집 과정에서 좀더 공격적으로 극의 템포를 빠르게 가져갔다. 초반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넣어 관객의 뇌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고 장면도 앞으로 당겼다. 그 후 템포를 천천히 가져가 관객이 비니에게 충분히 공감하게끔 만들려 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이번 영화의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어떤 식의 협업이 이뤄진 건가.
벤 영거 감독_ 운 좋게 감독님이 영화에 투자를 해줬다. 감독님이 한창 <사일런스>(2016)를 촬영하느라 <블리드 포 디스> 현장에는 못 오셨다. 대신 편집실에 오셔서 같이 촬영본을 보며 지금의 버전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셨다. 화면을 보며 재생과 정지를 반복해가며 ‘어떤 장면이 좋은 장면인가’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복싱을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이 있지만 감독님의 <분노의 주먹>(1980)을 특히 좋아한다. 감히 내 영화와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마일스와도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복싱영화의 클리셰를 지양하고 우리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담아내려 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다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이 영화만의 차별점이 드러날 거라 생각했다.
-각자의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특히 마일스 텔러는 미국의 인디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두루 작업하며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데 그런 행보를 계속해나갈지도 궁금하다.
마일스 텔러_ 어떻게 하다보니 쉼 없이 다양한 규모의 영화들을 작업해왔다. 올해 이미 두 작품을 완성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작품들이다. 하나는 전쟁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게 된 미국 군인들의 이야기인 <땡큐 포 유어 서비스>(2016)다. 하루에도 20명이 넘는 젊은 군인들이 자살하는 현실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 것인가를 조명한다. 다른 하나는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연출하는 <노 엑시트>(2017)다. 실화에 바탕한 화재 사고 속 소방관 이야기다. 두 시나리오만 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해 좋은 시나리오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배우로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에런 에크하트_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이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내년에는 꼭 촬영에 들어가길 바라고 있다.
벤 영거 감독_ 모터사이클 경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찍으려 한다. 다음 작품은 2027년에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일동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