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④ 일상 속에 차오르는 슬픔 - <시인의 사랑> 배우 양익준·정가람
2017-05-08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정가람, 양익준(왼쪽부터).

“얘가 현장에서 엄청 능글맞은 눈빛으로 날 보더라고. 진짜 사랑할 뻔했어! (웃음)” 양익준이 정가람에 대해 말한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지원작이자 김양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시인의 사랑>은 제주도에서 고요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시인 택기(양익준)에게 불현듯 찾아온 감정의 격랑에 대한 영화다. 우연히 들른 동네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 세윤(정가람)은 택기가 애타게 찾아 헤매던 “함부로 아름다운” 존재다. 이 작품은 <똥파리>(2008) 이후 날것의 언어와 거친 이미지의 배우로 각인되어왔던 양익준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4등>(2015)의 어린 광수 역으로 주목받은 신예 정가람의 더욱 깊어진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게 되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다고 두 배우는 말한다.

-<시인의 사랑>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양익준_ 김양희 감독의 단편 작업에 참여했던 것을 계기로 10년 전부터 감독님을 알고 지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지난해 <시인의 사랑>의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너무 매력적인 거다. 관광지가 아니라 제주도의 일상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유명하지도 않고 혼자 시를 써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남자가 동네 총각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아마 감독님은 당황하셨을 거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바로 “할게요!”라고 해서. (웃음) 생각해보니 여성감독님과 함께 작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더라.

=정가람_ 나는 오디션을 봤다. 시나리오를 읽는데 소년 역할이 정말 매력적이더라. 시인과 나누는 미묘한 감정이나 소년의 개인사와 얽힌 복잡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감독님과 미팅을 할 때 ‘하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을 계속 쐈다. (웃음)

양익준_ 나는 가람이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감독님이 내게 출연을 제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소년은 ‘드니 라방’ 같은 인물”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역할을 준비하며 두달 동안 드니 라방의 이미지로 세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사하고 멋진 경상도 남자가 와버린 거다. (좌중 웃음) 가람이를 만나며 내 안의 생각들을 서둘러 지워야 했다. 그런데 되게 좋더라. 가람이가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라서.

-영화를 보며 가장 놀라웠던 건 시인으로 분한 양익준의 모습이다. 이토록 무기력하고 한없이 섬세한 모습을 근래의 출연작에서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익준_ 내가 맡은 시인 현택기의 롤모델이 실제로 제주에 있다. 현택훈 시인이라는 분이다. 감독님과 함께 그분을 만나 뵈었는데, 너무 순하고 푸근한 인상의 소유자이신 거다. ‘곰돌이 푸’ 같은 느낌이랄까. 화가 날 때도 나는 감정 표현이 앞서는데 그분은 얼굴에 잠시 그늘이 지는 정도? 촬영할 때도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을 눌러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고, 롤모델이 있는 상태로 연기를 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한편으로는 택기를 연기하며 예전의 내 모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영화를 18년간 해오면서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나에게도 순둥이 같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기질을 간직하고 있었을 때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정가람_ 나 역시 세윤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밀양에서 20년 동안 살았는데, 늘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있었다. 세윤을 연기하며 그런 답답함을 안고 가는 게 중요했던것 같다.

-시를 쓰는 택기와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를 방황하는 세윤의 언어가 충돌하는 지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양익준_ 동의한다. 택기의 화법은 시인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만들어진 건데, 그 화법을 뭉개고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는 세윤의 존재가 택기에겐 굉장히 충격적인 거다. 비유하자면 시인의 생태계를 세윤의 언어가 작대기로 후벼파는 느낌이랄까. 택기의 입장에서는 엄청 거칠지만, 그게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거지.

정가람_ 시나리오를 읽고 세윤은 거의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불같은 성격과 언어의 소유자일 거라 생각했다. 한때 행복했지만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뒤 모든 게 바뀌어버린 인물이잖나. 그런 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풀 데가 없으니 특정 순간에 분노를 불현듯 표출하는 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의 생각보다 내가 더 나아간 지점이 있는 것 같아 절충을 해야 했지만, 세윤의 언어를 고민하는 도중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감독님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택기가 시를 낭송하는 대목이 적지 않게 나온다. 능숙하게 시를 잘 읽더라. (웃음)

양익준_ 문장의 어미를 마무리하는 게 정말 힘들더라. 평소의 나같았으면 ‘그리움이 떠났네~’라고 했을 텐데 시를 읽을 때에는 더 차분하게 ‘그리움이 떠났네…’, 이런 느낌이어야 하니까. 감독님이 후시녹음을 할 때에도 굉장히 철저하게 이런 부분을 신경 쓰셨다.

-영화의 엔딩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스포일러이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찍었나.

양익준_ 평범한 일상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이제까지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 없던 남자가 불현듯 진짜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순간을 떠올렸을 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더라. 김양희 감독에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고 테이크를 40여번은 간 것 같다. 영화를 본 지금까지도 내 선택이 맞았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마치 첫 경험 직전에 바지를 내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느낌? <시인의 사랑>은 내게 여전히 어려우면서도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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