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라틴아메리카적인 것, 마술적 리얼리즘이 내 영화에도 있다.” <호랑이는 겁이 없지>는 멕시코 마약전쟁으로 갱들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직접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다. 용감한 호랑이에 자신을 투영하는 동화적인 믿음, 현실의 폭력성을 유령이 등장하는 호러 판타지로 치환한 아이들의 상상력이 내내 슬픔을 자아낸다. 올해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은까마귀상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이사 로페즈 감독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밀어붙인 덕분에 멕시코영화의 저력을 입증한 주목받는 감독이 됐다.
-7년 전에 멕시코에서 코미디영화를 연출한 이후로 오랜만에 작품을 내놨다.
=7년 동안 미칠 것 같았고, 그사이 나는 할리우드 드림에 실패했다. (웃음)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연락을 받고 5년 정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하다가 제작 단계에서 자꾸만 엎어졌다. 그런 일이 세번이나 반복됐고, 그중엔 내가 투자한 작품도 있었다. 더이상은 못하겠더라. 그제야 다른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가끔은 절망이 도움이 되는 법이다.
-멕시코의 마약전쟁을 배경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가 있나.
=할리우드에서 쓴 시나리오 중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생긴 마약 카르텔의 기원을 찾는 이야기였다. 미군이 아편을 제조하면서 멕시코 사회도 변하기 시작하고, 일종의 재앙적인 변화를 맞는다. 그중에서도 내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던 건 전쟁과 마약 문제로 인해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받는가 였다.
-문제적 현실을 리얼리즘이 아니라 호러, 판타지 장르의 장치를 빌려 표현한 이유는.
=현실을 영화적인 장치로 여과시켜 보여주는 것은 영화감독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마약전쟁은 여태 호러나 판타지 장르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주로 미국 드라마 <나르코스> 같은 리얼리즘 드라마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멕시코에서 일어나는 일은 호러 그 자체다. 마약전쟁의 이미지를 한번 접하고 나면 이미 호러가 거기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등장하고, 현실과 그 경계 너머의 세계가 합쳐지는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이들의 순진한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미장센들이 인상적이었다.
=<피터팬>(1953), <구니스>(1985), <스탠 바이 미>(1986) 등 어릴 적부터 아이들 혹은 청소년이 등장하는 장르물의 엄청난 팬이었다. 아이들은 판타지 장르를 진심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대상이다. 특히 이번 영화의 에스텔라는 <피터팬>에서 처음으로 에버랜드를 경험해보는 소녀 웬디와 비슷한 과정을 겪길 바랐다.
-에스텔라가 비는 세 가지 소원, 용과 호랑이 등 영화에 사용된 동화적 소재들은 한국에서도 매우 익숙한 것들이다.
=바로 그거다. 전세계 모든 문화에 스며들 수 있는 원형을 찾으려 했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는데,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중요한 상징들을 배웠다. 영화 속에서 엄마의 유령이 복수를 지시하는 것 역시 일부러 멕시코의 <햄릿>을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만큼 햄릿의 서사가 원형에 가깝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폭력, 끔찍한 환영 등이 등장하기 때문에 아역배우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겠다.
=아이들은 절대 미리 스크립트를 읽지 않게 하고 캐릭터와 상황만 가지고 촬영에 임했다. 필요한 경우 촬영을 앞둔 신만 읽어주면서 스스로 조금씩 발견해가도록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정말로 ‘진짜’에 가까운 반응들을 보여줬다. 샤이네 역을 연기한 배우는 실제로 고아인데, 나 역시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아버지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에게 마음이 갔다. 세상에 혼자 남는 것에 대해 우리 둘은 잘 알고 있었고, 그 고통에 다가서는 방법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호러적인 장치에 있어서는, 숙소나 로케이션 세트의 조명을 매우 어둡게 만든 뒤 아이들을 그 안으로 데리고 갔다. 어둠 속에서 충분히 무서운 상상을 한 다음에 촬영장으로 바로 이동해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연기가 끝난 뒤, 즉 내가 컷을 외친 이후다. 몰입은 쉽게 시킬 수 있지만, 공포나 분노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은 아직 어리고 전문 배우도 아니지 않나. 언제나 컷 직후에 달려가서 “네가 이 감정의 주인이야”라고 말하고 아이들을 다독여줬다.
-영화를 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연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화제다.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있나.
=확정되기 전부터 그런 기사가 났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진짜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준비 중이고, 나는 매우 흥분 상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에게 프로듀싱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다. 같은 멕시코 영화인이라고 연락하기 쉬울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웃음) 그런데 몇몇 영화제 상영 후 트위터에서 내 영화를 기예르모의 것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반응이 모인 후 내가 직접 “기예르모, 이래도 내 영화 안 볼 거야?”라면서 그에게 도발적인 멘션을 보냈다. 그러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기예르모의 협업 제안은 내게 상상 이상으로 큰 의미다. 덧붙여 그가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임을 알게 돼 기쁘다.
-차기작 계획을 들려준다면.
=일단 코미디영화 한편이 예정돼 있다. 세명의 인물이 멕시코의 마지막 왕조와 관련해 큰 실수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호랑이는 겁이 없지>와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또 하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와 준비 중인 다크 판타지물이다. 아주 암울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호러영화도 찍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