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다. ‘멜로영화의 거장’ 허진호 감독이 남성 캐릭터들간의 관계맺음과 감정의 흐름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영화를 만드는 건.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이하 <천문>)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과 당대의 천재 기술자 장영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사극이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본격적으로 탐구된 적 없던 장영실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세종대왕과의 관계, 최민식(장영실 역)과 한석규(세종대왕 역)라는 두 걸출한 배우의 협업,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라는 키워드는 <천문>을 2019년 가장 궁금한 한국영화의 목록 상단에 자리하게 만들었다. <덕혜옹주>(2016)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허진호 감독은 <천문>을 통해 어떤 시선으로 조선시대의 인물과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까. 크랭크업을 한달여 앞두고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허진호 감독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밑그림을 짐작해보았다.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나.
=3분의 2 정도 찍은 것 같다. <천문>은 가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 촬영 도중 눈이 오는 바람에 조금씩 일정이 미뤄졌다. 전북 부안, 경북 문경의 야외 세트장에서 촬영하고 있다.
-<천문>을 연출하게 된 계기는.
=<덕혜옹주>를 제작한 김원국 대표가 3년 전 <천문>의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역사적 인물인 장영실과 세종대왕의 관계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당시에는 사정상 시나리오만 재미있게 읽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못했는데, 올해 다시 제안을 받으며 <천문>에 합류하게 됐다.
-장영실은 아직까지 한국영화가 깊이 탐구한 적 없는 인물이다. 그와 세종대왕의 관계를 영화가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궁금하다.
=<천문>을 준비하며 장영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비출신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출생과 유년 시절, 곤장을 맞고 파면당한 이후 말년의 생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더라. 그런 빈틈이 흥미로웠다. 노비 출신으로 종3품까지 올랐다는 건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인 듯한데, 함께 많은 일을 이루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왜 틀어졌으며, 장영실은 왜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했다.
-2019년은 공교롭게도 세종을 다룬 두편의 영화(<천문> <나랏말싸미>)가 개봉하는 해다. <천문>이 선보일 세종대왕의 모습은 어떨까.
=<천문>에 출연하는 한석규 배우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이미 세종의 한 부분을 표현했었던 것 같다. 영화를 준비하며 우리가 역사 교과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세종의 모습 이외의 인간적인 그의 모습을 더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지금 단계에서 많은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세종은 왕이라는 틀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좀더 자유로운 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천문>은 최민식, 한석규 배우가 <쉬리>(1998) 이후 20년 만에 재회한 영화로 화제가 되고 있다. 두 배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우선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배우들이다. 한석규 배우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함께 작업한 적 있지만. <천문>에서는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브로맨스’ 같은 느낌들이 있는데, ‘최민식과 한석규라는 조합’으로 이 감정을 표현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둘이 굉장히 친하다. 대학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고. 그런 개인적인 친분 또한 이 영화에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한 화면에 담긴 두 배우를 보는데 굉장히 힘 있고, 화면이 꽉 찬 느낌이 들더라. 세종과 영실의 유대 관계를 실제로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세종 역에 한석규를, 장영실 역에 최민식을 염두에 두었던 건가.
=그렇지 않다. 누가 세종을 연기하고 누가 장영실을 연기할 것인지 정해놓지 않고 만났다. 두 배우 중 누가 어떤 배역을 맡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석규, 최민식 배우는 그동안 서로 다른 성향의 작품을 선택해왔고 배우로서의 기질도 많이 다른데, 그런 두 배우에 대한 나의 직감에 의지해 캐스팅을 완료했다. 다른 버전이었어도 매력적이었겠지만, 현장에서 지켜본 바로는 지금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웃음)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로는 어떤 에피소드가 등장하나.
=이 영화는 20여년간에 걸친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전에 영화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세종과 장영실이 함께 만들었던 간의대(천문 관측 시설), 자격루(자동 물시계) 등의 기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또 장영실이 만든 세종의 안여(임금의 마차)에 관한 이야기도 비중있게 소개될 예정이다. 간의대와 안여의 경우 제작에 공을 많이 들였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보는 즐거움도 있을 거다.
-<천문>이라는 가제의 의미는.
=‘천문’(天問)은 ‘하늘에 묻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종과 장영실이 살았던 시대에는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시간을 안다는 건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안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다가 하늘에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고유한 것들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
감독 허진호 / 출연 최민식, 한석규,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김원해, 박성훈, 전여빈 /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 개봉 2019년
● 시놉시스_ 세종 24년. 이천 행궁으로 행차하던 도중 세종이 타고 가던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안여를 만든 장영실은 파직된 뒤 자취를 감춘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과 그와 뜻을 함께했지만 한순간에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브로맨스인 듯 아닌 듯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_ “브로맨스라고 규정짓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허진호 감독은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의 핵심인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관계를 특정한 단어 속에 가두길 원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조선이 인정하는 천재였지만 한 사람은 왕, 한 사람은 노비였다. 그런 그들이 신분의 차이를 떠나 서로를 알아보고 각자의 꿈을 지지하며 친구처럼 의지하는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그 정서적 교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