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8년 만의 신작이다. <파수꾼>(2011)의 윤성현 감독은 당시 한국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신인감독이었다. 그의 데뷔작은 배우 이제훈을 스타로 발돋움하게 만들었고,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청춘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제2의 <파수꾼>을 꿈꾸게 만들었다. 이렇게 모두가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린 지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의 차기작을 2019년에는 과연 볼 수 있을까. 과거 2011년 당시 <씨네21>이 윤성현 감독을 올해의 신인감독으로 선정했을 때 그는 선정 소감에서 “앞으로 진정 내가 즐기고 싶은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 장편영화 <사냥의 시간>(가제)이 그가 말하는 진정 즐기고 싶은 영화인지 궁금해 후반작업 중인 윤성현 감독을 찾아가 곧 완성될 영화에 관해 물었다.
-데뷔작 <파수꾼> 이후 두 번째 영화를 내놓기까지 8년이나 흘렀다.
=한동안 사이버 펑크 장르의 영화를 준비했었다. 지금보다 예산이 배 이상 되는 영화였는데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방향성을 가진 이야기를 나만의 색깔로 풀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진행이 잘 안됐고 이후 <사냥의 시간>(가제)을 준비하게 됐다.
-<파수꾼>과 사이버 펑크 장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당시 기획 방향도 궁금하다.
=어릴 적 미국에서 자라면서 좋아했던 <E.T.> <에이리언> <터미네이터> <죠스> 같은 영화들이 감독으로서의 밑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왜냐하면 첫 단편영화를 찍었을 때 작품 안에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파수꾼>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보자는 생각으로 접근했던 영화다. 그런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영화 취향이 <사냥의 시간>(가제)의 기획으로 이어지게 된 것인가.
=어릴 적 봤던 <매드맥스>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들이 지닌,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시네마틱한 경험을 안겨줄 매체적 특징이 뭘까를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한창 이 시나리오를 쓸 때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이슈화됐었는데, 당대 젊은이들이 느끼는 현실을 동화적으로 보여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한국 상업영화로서도 나 개인으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떠오른 키워드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의 몰락한 근미래 도시 풍경, 범죄에 연루된 거리의 남자아이들, 그리고 탈주극 같은 요소들이다.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혹은 레퍼런스가 된 작품들이 있나.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다. 내가 겪은 환경 이야기도 아닌데 학창 시절에 나는 이런 판타지에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공감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별개로 그 작품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판타지가 지닌 확장성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런 영역으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가제)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른 유의 영화인데, 공통점이 있다면 젊은 친구들이 나오고 이들이 지닌 정서적인 유대감이나 죄의식이 비슷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파수꾼> 이후 이제훈과 다시 만났다. 그외에 안재홍과 최우식, 박정민까지, 그들이 지닌 배우로서의 아우라와 이 영화가 원하는 길거리 아이들의 이미지가 어떻게 부합했을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 배우의 이미지를 캐릭터에 억지로 맞추려는 식으로 정해놓고 쓰진 않았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스트리트 패션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의 배경이 빈민가 같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기에 옷차림이나 말투, 걸음걸이 같은 표현 방식은 마티유 카쇼비츠의 <증오>(1995) 속 빈민가 아이들을 많이 참고했다. 이제훈 배우에게는 한동안 실제로 스트리트 패션을 입고 다니게 했다.(웃음) 안재홍 배우는 <족구왕>(2013)에서 보여줬던 이미지와 다르게 욕도 잘하고 머리도 삭발하고 회색으로 염색도 하게 했다.
-의문의 캐릭터 한 역을 맡은 배우 박해수는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로 데뷔 11년만에 신인상을 받는 등 많은 활약을 보여줬다. 그에게 어떤 역할을 맡겼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한이란 인물은 아사노 다다노부 같은 배우가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품격 있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마스크의 배우가 필요했는데 <소수의견>(2015)에 그가 잠깐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 찾아보니 연극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배우였다. 그가 출연한 연극을 찾아보면서 어떤 확신이 들었다.
-시각적으로 어떻게 구현됐을지 궁금하다. 프로덕션 디자인이 중요한 작품이 될 것 같다.
=비주얼적인 레퍼런스는 <증오>나 <칠드런 오브 맨>(2006)을 참고했다. 그리고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 부분도 많다. 표현 방식은 <파수꾼>의 영역과 비슷한 부분도 있고. 이런 면에서 한국영화로서는 이전에 대중과 접점을 찾아나간 선례가 없다. (웃음) 영화의 세계관을 관객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시각적인 디테일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잘 표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예산이 얼마나 들었을지 궁금하다.
=순제작비가 90억원 정도다. 적어도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국내에서 나쁜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촬영 당시 감독이 미쳤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웃음) 정해진 예산 안에서 세트와 로케이션 촬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건축물 헌팅에만 1년 가까이 시간이 소요됐으니까. 미술, 촬영, 조명, 음악 등 웬만한 스탭 모두 신인감독들과 작업하고 싶었다. 굉장히 부족한 예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득될 수밖에 없는 세계관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사냥의 시간>(가제)
감독 윤성현 / 출연 이제훈, 최우식, 안재홍, 박정민, 박해수 / 제작 싸이더스 / 배급 리틀빅픽처스 / 개봉 2019년
● 시놉시스_ 경제 붕괴의 여파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진 대한민국. 빈민가와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가던 네명의 친구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기 위해 위험한 범죄를 계획한다. 그들은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 무너진 세상에서 끝까지 쫓는다_ <사냥의 시간>(가제) 시나리오를 읽고 즉각적으로 떠오른 정서적 여운은 <터미네이터>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윤성현 감독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 양상을 비롯해서 장르적인 톤 앤드 매너를 두고 “위의 두 영화 사이 어디엔가 위치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