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만스>를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가장 개인적인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개인사를 전면에 내세운 첫 작품이지만, 영화가 복기하는 그의 청소년기는 그가 천착해온 주제나 무의식, 궁극적으로 연출 철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때문에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영화사를 다시 써내려가는 시작점이다. 영화는 유년기의 스필버그가 투영된 캐릭터, 새미(마테오 조리안)가 필름메이킹에 매혹됐던 최초의 순간부터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하기 전까지를 다룬다. 부모의 이혼, 존 포드 감독과의 인연 등 이미 세간에 알려져 있는 스필버그에 대한 일화가 영화적으로 재배열되면서 <파벨만스>는 예술과 삶, 이미지가 진실을 포착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3월22일 국내 개봉예정인 <파벨만스>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이미지의 통제, 감정의 이해
1952년 뉴저지, 부모와 함께 극장을 찾은 새미는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 열차 사고 신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인다. 잠 못 이루는 새미는 아빠 버트(폴 다노)가 사준 라이오넬 전기 기차로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하며 무서움을 떨쳐보려 하지만, 한없이 미니어처 기차를 망가뜨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때 엄마 밋지(미셸 윌리엄스)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놀랍게도 ‘사진 이미지’의 본질이다. “기차가 충돌하는 순간을 8mm 필름카메라로 녹화하면 반복해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공포는 사라지고, 실제 기차는 계속 부서지지 않아도 돼.”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이어 붙이면 직접 서스펜스를 만들 수 있고, 더 나아가 이미지의 통제가 감정의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깨달은 새미는 가내 수공업으로 여동생들이 배우로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버트가 몸담은 컴퓨터 산업의 성장으로 애리조나로 이주한 새미(가브리엘 라벨)는 광활한 사막에서 보이스카우트 제복을 입은 친구들과 서부극과 전쟁영화를 찍는다. 어느덧 그는 자신만의 장르 문법을 개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8살 때 8mm 필름영화를 찍고 16살 때 연출한 영화를 동네 영화관에서 정식 상영한 스필버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파벨만스>는 영화 이미지가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는 근본적 속성에 보다 집중한다. 이렇듯 거장은 현학적 포장 없이도 개인의 미시사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사유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E.T.>에서 <캐치 미 이프 유 캔>까지, 스필버그 영화의 많은 아이들은 부모의 싸움을 목격하거나 이미 집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E.T.>의 초안은 외계인이 아예 등장하지 않고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스필버그의 어머니 레아 아들러는 1966년 이혼 소송을 제기해 1967년 남편 아널드 스필버그와 이혼했고, 곧바로 가까운 친구 버니 아들러와 재혼했다(<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만들어진 영화다. 레아 아들러는 2017년, 아널드 스필버그는 2020년 작고했다).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4천만달러짜리 치유”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부모의 이혼, 특히 친구와 외도했던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으로 밋지와 버트는 다른 기질을 타고났다. 밋지는 “영화는 잊지 못할 꿈”이라고 하지만, 버트는 영사기가 초당 24장의 사진을 스크린에 투사했을 때 왜 인간의 뇌가 이를 움직임으로 인지하는지, 그 원리를 설명한다. 밋지는 열정적인 피아니스트였지만 결혼 후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전업주부가 됐고, 기술 회사에서 근무하는 버트는 과학적 논리를 사랑한다. 밋지는 모험을 즐기지만 버트는 안정을 추구한다. 버트의 기술자적 면모와 밋지의 예민한 예술가적 성정은 새미,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필버그 안에 공존하며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시네아스트가 된 그의 독보성을 설명한다.
한편 영화 이미지는 사실 그 자체일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 새미의 카메라가 목격한 불편한 진실은 그가 잠시 영화 제작을 그만두는 계기가 되지만, 결국 새미는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다시 카메라를 든다.
유대인 차별과 스필버그의 관용
새미의 삼촌 보리스를 연기한 저드 허슈는 10분 남짓 되는 출연으로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서커스에서 일했고 무성영화에도 출연했던 그는 일찌감치 예술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새미에게서 자신을 본다. 삶은 예술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예술은 삶을 파괴할 수 있고, 재능을 지나치게 헌신하면 사랑하는 사람까지 잃을 수 있다는 조언은 씁쓸한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이주 후 반유대주의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유대인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새미는 다시 영화를 만들면서 비로소 성장한다. 프롬 파티에서 상영한 해변영화는 연출자가 아웃사이더이기에 가능한 시선이 투영돼 있고, 편집의 마법은 증오를 초월한 포용으로 승화돼 가해자의 악의를 부끄럽게 만든다. 예술과 삶의 공존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 보리스에게 스필버그는 자신을 괴롭힌 악당을 도리어 영웅으로 묘사한 짧은 영화로 대신 답을 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 캘리포니아 학교를 다닐 당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괴롭힘을 당했던 스필버그에게 <쉰들러 리스트>는 일생일대의 과업이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필버그는 개인의 결핍과 우울감을 분노보다는 화합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휴머니스트다. 가해자 쉰들러의 헌신으로 유대인을 구하는 <쉰들러 리스트>가 대책 없이 순진해 보였는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그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필버그는 시네마의 본질이 관용과 맞닿을 수 있고, 그리하여 인간은 예술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치유될 수 있다고 절절히 고백한다.
존 포드 감독과의 인연
새미는 스스로 SF, 호러, 서부극, 전쟁영화를 만드는 영상 문법과 기술을 터득한 독학자다.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영화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선배 감독들의 작품이 곧 그에게 스승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에른스트 루비치, 구로사와 아키라, 앨프리드 히치콕, 스탠리 큐브릭,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클라렌스 브라운 등 스필버그에게 이정표가 됐던 중요한 이름 중에서도 존 포드는 특기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는 친구들과 몰래 극장에 잠입한 새미가 탐닉하는 영화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선택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다큐멘터리 <감독 존 포드>에 언급되기도 했던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영화 애호가들은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한 새미가 만난 거장 감독을 연기한 카메오의 존재에 열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