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성적이 완전히 다른 해였다.” 2024년 CJ ENM은 상반기에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기획한 영화들을, 하반기에 팬데믹 이후 모험적인 시도를 담은 작품들을 개봉시켰다. 관객은 후자에 훨씬 열렬하게 반응했다. 소비자의 변화를 체감한 만큼 CJ ENM의 새로운 사업 모델, 그들이 가진 인프라를 통해 창작자의 재능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더욱 견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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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CJ ENM의 극장 영화 성적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외계+인> 2부, <도그데이즈>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등 상반기에는 상대적으로 일찍 투자가 결정돼 제작된 영화들이 개봉했고, 하반기에는 <베테랑2> <하얼빈> 등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작품들이 관객을 만났다. 과거 흥행 영화의 패러다임에서 기획한 영화와 시장변화를 보고 준비한 영화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체감할 수 있던 해였다.
- <파묘> <서울의 봄>이 천만 영화가 되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서브스턴스> 등이 예술영화 시장에서 선전했다. 타사 작품들의 지난 결과물을 보며 관객의 변화도 체감한 바가 있었을 텐데.
2010년부터 10년 정도 지속된 사이클이 있었다. 성수기에 일정 물량을 쏟아부은 텐트폴 영화를 개봉시키면 최소 안타, 최대 홈런을 칠 수 있었다. 당시 흥행 영화의 공식이 존재했고 그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이 확장됐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재구성됐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극장 영화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에너지가 시장에 잠재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반가웠다. 소수의 팬덤이나 적극적으로 발화하는 관객층이 붙어서 SNS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 영화들이 있다. 예술영화의 경우 미국의 A24가 지난 10년간 일정한 팬덤을 구축하며 그들의 작품이 계속 안타를 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기생충>을 함께한 네온, <서브스턴스>의 북미 배급을 담당한 무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역시 이같은 모델이 가능한 새로운 지형도가 펼쳐지고 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기획해야 할지 참고해야 할 의미 있는 사례들을 봤다.
- 2025년 CJ ENM의 라인업 편수가 적다, CJ ENM이 투자한 영화가 많지 않다는 것은 업계에 적신호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사업부의 조직 규모를 축소한 배경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적신호가 아니다. CJ ENM 입장에서는 사업 축소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답을 드릴 수 있다. 개봉작 편수는 2~4년 전 일어난 사건들이 반영된 결과 지표다. 대작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개봉 자체가 적체되면서 자본시장이 위축되고 투자가 얼어붙었다. CJ ENM이 과거 100편 중 10편에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모수 자체가 줄어들었다. 작품 투자 기준 자체는 바뀐 게 없는데 그 기준을 넘는 작품 수가 줄어들었다고 설명하는 게 정확하다. 이때 기준을 낮추고 편수를 맞추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시장의 악순환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봤다. 업계에서 체감하기에 지금 TV드라마 시장이 무척 어려운 반면 영화계 기획 개발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양질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OTT로 떠났던 창작자들이 다시 돌아오고, 작품의 갈피를 잡고 시나리오를 써내는 시기가 됐고, 유망한 크리에이터들이 산업에 유입되고 있다. 지금의 과정 지표는 2~4년 뒤 결과 지표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변화함에 따라 사업 모델이 달라지고 내부적으로 재조직과 재배치가 필요했다. 영화사업부의 변화 역시 물리적인 축소라기보다는 생산 기반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 언론을 통해 알려진 CJ ENM의 차기작은 CJ ENM이 이미 보유한 IP를 다각적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다. <극한직업> <수상한 그녀> <베테랑> 등을 해외에서 리메이크하거나 영화 <조작된 도시> IP를 시리즈 <조각도시>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그 예다.
리메이크 작품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많아야 30% 정도다. 사실 리메이크는 예전에도 존재했던 전략이고 지금은 그 열매를 맺는 단계라 수가 많아 보이는 것일 뿐 대부분은 오리지널 IP를 기획하고 있다. <조각도시>는 <조작된 도시>의 리메이크라기보다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다만 영화계의 리소스를 시장의 변화에 맞게 활용하는 방향을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있고 이 역시 그 맥락에 있는 작품이다.
-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CJ의 밤 행사에서 CJ ENM은 연간 1조원 규모의 콘텐츠 투자를 집행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콘텐츠 투자 중 영화부문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회사 차원에서 콘텐츠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다. 영화 투자를 위해 모태펀드에도 출자했다. 과거 흥행 공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한 작품들, 신진 창작자들을 과감하게 지원하기 위함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한국영화의 노하우와 비즈니스 모델을 적용해가며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최근엔 아시아 창작자들이 아시아의 문화적 특색을 살린 작품을 개발할 수 있는 펀드를 만들어 그들이 글로벌 메인 스트림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중이다.
- <지구를 지켜라!>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부고니아>를 CJ ENM이 주도적으로 제작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연출하게 되어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나.
4~5년 전쯤 CJ ENM이 갖고 있는 IP 중 지금 할리우드 시장에 베팅해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만한 작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저주받은 걸작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렸다. 우연히 LA에서 아리 애스터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를 소개하는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에게 제작을 제안했더니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부고니아>는 참여한 사람들이 커리어의 절정에 있을 때 만난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개발하던 윌 트레이시가 썼던 <석세션>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에미상까지 받으면서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프로젝트가 됐다. 심상치 않은 시나리오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A급 배우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과거의 개성 강한 작품을 다르게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고유의 텍스처가 센 감독이 연출해야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정도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가여운 것들>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에마 스톤과 이야기가 오갈 때 그가 <가여운 것들>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때 할리우드 스튜디오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아주 좋은 조건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포커스 픽처스와 작업하게 됐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배급을 CJ ENM이 가져가는 권리도 유지했다. 한국영화의 창의성을 메인 스트림 영화로 월드 와이드 릴리스할 수 있는 모델을 실험하는 영화가 됐다.
- 올해 만날 수 있는 한국영화는 <악마가 이사왔다> <어쩔수가없다> 두편이다.
재능 있는 크리에이터 이상근 감독의 <악마가 이사왔다>는 새로운 세대에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아주 귀여운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기생충>과 비슷한 모델로 한국어영화를 해외에 어떻게 확산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영화다. 순제작비를 해외 세일즈만으로 회수할 목표로 달리고 있다. 해외 세일즈를 위한 안정적인 인프라 구조를 만들고, 감독의 예술적 비전을 펼치면서 여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부장이 뽑은 2025년 기대작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감독 필감성 / 출연 조정석, 이정은, 조여정, 윤경호, 최유리 / 배급 NEW
“2025년은 전형적인 흥행 영화보다 새로운 시도들이 돋보이는 해다.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은 신선한 소재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움직이고 그것이 입소문을 만들어서 확산되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파묘>와 같은 성공모델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