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10] - 노 맨스 랜드
2003-03-2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누구나 본성의 포로라네

“쯔즛, 르완다는 정말 끔찍한 난장판이군.” <노 맨스 랜드>에서 신문을 보던 한 보스니아 군인이 이렇게 말한다. 세르비아와 전쟁 중인 그가 아프리카 르완다의 내전을 개탄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든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르완다나 보스니아나 오십배 백보일 텐데 전쟁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용기를 주는 것은 자신이 참가한 전쟁이 성전이요 정당방위라는 믿음이다. 지금 부시가 획책하는 전쟁에서도 다르지 않다.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동일한 악마로 규정하는 이 선동은 제3자의 눈에 너무 뻔한 거짓말인데 미국인의 전쟁지지율은 반전의 목소리보다 높다. 이성을 믿는 근대의 정신도 이런 사태 앞에 속수무책이다.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역사에서 인류는 이성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의 교훈을 배웠지만 감정적으로는 반목과 적대감만을 키웠는지 모른다. 91년부터 95년까지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 옛 유고슬라비아 여러 나라의 전쟁은 그 시험대였다.

당시 전쟁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세르비아를 박해했던 이슬람, 크로아티아인의 대결 양상으로 이뤄졌다. 오랜 세월 압제의 그늘에 신음했던 세르비아인들에게 그들만의 나라를 만들자는 호소는 거부할 수 없는 선명한 깃발이었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복수는 대학살로 이어졌고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노 맨스 랜드>는 이 전쟁의 한복판을 무대로 삼는다. 세르비아군과 보스니아군이 대치한 전선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참호, 보스니아 군인 치키와 세르비아 군인 니노는 각자 부대에서 고립된 이곳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서로를 도와줘도 살아남기 어려운 곳에서 그들의 취하는 행동은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치키는 세르비아군이 고향의 가족을 학살했던 사실을 잊지 못하고 니노는 이슬람인이 오랜 세월 세르비아 민족을 지배했던 과거를 상기한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자기 부대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적의 총을 뺏을 수 있는지만 호시탐탐 노린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이 무시무시한 비이성적 논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2001년 칸영화제에서 <노 맨스 랜드>는 국내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보스니아판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말을 들었다. 첨예한 전선의 한가운데에서 양쪽 군인이 만나는 설정이나 그것을 희비극으로 변주한 점이 <공동경비구역 JSA>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비슷한 면모를 갖추고 있는 두 영화가 결정적으로 갈리는 대목이 있다. 그건 이 두 영화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가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문제는 분단이라는 체제다.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의 희생양이 된다. 휴전선을 만들고 보초를 서고 전쟁 예비훈련을 하는 것은 역사가 뒤엉킨 탓이지 그들의 오류가 아니다. 그들의 과오는 상대방을 인간이기 이전에 적으로 여기라는 체제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뿐이다. 영화에서 그들은 시스템을 거부하는 안티히어로가 되고 모든 책임은 분단체제가 지게 된다. 거꾸로 말해 <공동경비구역 JSA>에는 분단만 아니라면 인간의 선함을 지킬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있다. <노 맨스 랜드>는 반대다. 여기서 상대방을 향한 총구가 불을 뿜는 것은 무작정 체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들은 자꾸 상황을 악화시키는 편을 택한다. 악독한 체제가 감시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상대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댄다. 발칸반도에 평화가 오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의심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도저한 절망감이 그들의 못난 행동에 낄낄거리는 순간에도 이어진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난 그 비관적 전망에 소름이 끼쳤다. 군대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게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인물들처럼 휴전선을 넘는 용기를 발휘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노 맨스 랜드>의 참호 같은 곳에서 먼저 총을 버리고 화해의 악수를 청할 이는 얼마나 될까? 아마 절대 다수는 <노 맨스 랜드>의 치키와 니노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건 꼭 상대방을 미워해서만은 아니다. 그냥 알지 못하니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까 위협적으로 느낀다. 그런 순간, 손에 총이 있다면 당신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비수처럼 파고드는 그 질문은 이제 발칸반도에서 한반도로 옮겨와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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