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4] - 팜므파탈
2003-03-2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팜므파탈>(Femme Fatale)

히치콕, 누아르에 입맞추다

유럽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너의 징후를 즐기라며 핏대를 세우고 의자를 옮겨다니던 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현대 영화이론을 매혹시키고 있는 두 가지 소재를 선언하며 마지막 장의 첫 문단을 시작한다. ‘히치콕의 영화와 필름누아르.’ 이 둘은 한 등에 붙어 있지만, 한 몸통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히치콕은 히치콕이며, 누아르는 누아르이다. 그러므로 세상 어느 영화이론가보다도 히치콕을 잘 알고 있는 히치콕 문하생 브라이언 드 팔마가 필름누아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히치콕적 누아르’는 그 어디에서도 손쉽게 탄생할 수 없다. 이 희박한 창조적 결합의 순간만으로도 <팜므파탈>의 존재는 희귀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묻어둔다면 언제 다시 히치콕과 누아르의 대면을 목도하게 될지는 정말 자신할 수 없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혹적 요부, ‘팜므파탈’. 때로는 순수함으로, 때로는 요염함으로 비정의 탐정을 파멸의 순간까지 끌고 가는 거미 여인들. 또는 필름누아르의 뻥 뚫린 이데올로기적 허점, 그러나 장르의 대중적 불로장생을 약속하는 아이콘적 여신들. 파리의 호텔 방. 바깥에는 이제 막 칸영화제의 개막식이 준비 중이다. 팔등신의 미인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향해 총을 쏜다. 빌리 와일더의 필름누아르 <이중 배상>의 클라이맥스. 텔레비전을 보던 여자는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이 여자가 영화의 팜므파탈? 그렇지 않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첫 장면의 인물을 곧잘 맥거핀으로 사용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팜므파탈 로리에 의해 그녀는 가슴에 달린 10만달러짜리 황금 장신구와 함께 곧 죽어 사라진다. 황금을 가로챈 로리는 동료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그녀를 자신의 딸 릴리로 착각한 한 노부부는 로리를 집으로 데려간다. 그녀는 욕조에 피곤한 몸을 뉘인다. 7년 뒤. 미국으로 건너간 로리는 미국 대사관의 부인으로 파리를 찾는다. 파파라치가 그녀의 행적을 따라다닌다. 동시에 옛 동료들도 황금을 되찾기 위해 로리를 뒤쫓는다. 그녀는 파파라치를 이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팜므파탈의 본색을 드러낸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바로 이 팜므파탈에게 히치콕적 세례를 내린다. 팜므파탈과 히치콕적 주인공의 결합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기발하다. 영화 속에는 1인2역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두 여자의 이중적 정체성! 브라이언 드 팔마는 <현기증>에서 히치콕이 보여준 마들렌과 주디의 이중성을 자신의 영화 <팜므파탈>에서의 로리와 릴리의 관계로 치환해놓았다. <현기증>의 서사는 그녀 둘의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에게 있었다. 스코티에게 마들렌과 주디는 언제나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그래서 줄곧 의문으로만 쫓아다녀야만 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는 만약 마들렌과 주디의 서사를 축으로 영화를 다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이미지에는 데자뷔가 적당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는 중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느린 지각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만큼 비약적으로 펼쳐진다. <팜므파탈>을 보는 누군가가 스토리가 단순해서 미칠 것 같다고 좀더 오래 불평하면 할수록 그가 속고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길어지는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명백히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의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의 뫼비우스적 구조를 공간의 모자이크와 대위적으로 관계지어놓고 있다는 사실쯤이 될 것이다. 로리를 둘러싼 시간의 데자뷔와 그녀의 동행자인 사진기자 니콜라스가 붙여나가는 파리의 공간들은 중요한 순간에 서로를 보완한다. 하지만 이미 사건은 성립되어 있다. 그리고 불가해하게 반복되는 데자뷔의 이미지들은 찾아온다. 여기에는 분명 힌트가 있다. 이상한 사물의 멈춤이 있다. 수사가 아니다. 세심하게 릴리의 주변을 따라 훑다보면 아마도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 영화의 트릭이 <창 안의 여자>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정신을 가다듬게 될 것이다.

이미 프리츠 랑의 미국 시절 누아르 <창 안의 여자>를 본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이 글의 목적이 <팜므파탈>을 보기로 굳게(!) 선약한 관객을 위한 글인 만큼 모호함의 미덕을 갖추기로 한다. 그 약속이 지켜질 수만 있다면, <팜므파탈>은 히치콕, 필름누아르, 프리츠 랑, 데이비드 린치, 그 모두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사유의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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