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lombine)
멍청한 백인들!
<볼링 포 콜럼바인>을 뜻이 통할 만한 제목으로 옮기자면 ‘총질하는 고딩의 볼링’쯤 되지 않을까 싶다. 콜럼바인은 1999년 4월20일 에릭과 딜란이라는 이름의 미국 아이들이 교내에서 총을 마구 쏘아 12명의 학생과 교사 한명을 죽게 했던 그 고등학교 이름이다.
볼링과 총질하는 아이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감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특기 사항은 두 소년이 체육 수업으로 볼링반에 들었고 사건 당일 아침에도 볼링을 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볼링을 하면 폭력적이 되나? 물론 이건 마이클 무어 감독의 엉뚱한 유머감각의 소산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그토록 많은 총을 가져야 할 만큼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총질을 하고 급기야 어린아이들까지 학살의 주범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건 나도 궁금하다. 총기 소유에 관한 한 방임에 가까울 만큼 자유로우며 심지어 어린애조차도 그 끔찍한 물건을 언제든 손 안에 넣고 쏘아대는 나라가 대명천지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지? 슈퍼마켓에서 개당 17센트만 주면 누구나 총알을 박스째 살 수 있고 개들도 총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오발사고를 낸 적이 있다나!
궁금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지구상의 각종 암살과 전쟁의 장소에 나타난 미국의 진정한 얼굴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대해 <볼링 포 콜럼바인>은 시원스럽게 대답을 내질러버린다. 특히 10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끼워넣은 <짧은 미국사>는 정말이지 황당하기만 하다.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는 투다. 조지 W. 부시의 저녁 기도 시간을 뜨겁게 달굴 만하군.
만약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오사마 빈 라덴이 몰래 만들어 뿌린 전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인, 그것도 백인인 마이클 무어는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커다란 덩치를 흔들며 마치 야구에 관해 말하는 코미디언이라도 되는 듯 자기네 땅 여기저기를 쏘다닌다. 그러더니 농담과 심술, 재치와 선동이 뒤섞인 날렵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해냈다. 폭넓은 솔직함과 섬세함으로 자국의 치부를 촘촘히 추적해가는 성실성이 놀랍다.
의표를 찌르는 한 가지는 미국사회에 만연한 파멸적인 폭력의 원인을 두려움이라고 진단한다는 사실이다. 미사일로 바깥을 겨냥하고 총으로 서로를 겨냥하는 지상 최강의 제국이 실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허약한 거인일 뿐이란 말인가. 이같은 허약함을 기초로 제도화된 문화적, 심리적 시스템을 추적하는 것이 마이클 무어 감독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으로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어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미국 안에서는 불편하고 아니꼽다는 반응과 찬사가 공존하는 모양이다. 사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프랑스나 미국이 아니라 한국의 반응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개봉을 촉구’하는 영화목록에 이 다큐멘터리를 끼워넣은 <씨네21> 역시 무언가 고민이라도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예상되는 난관들을 떠올린 다음 해결책도 쥐어짜보기로 했다.
1. 미국영화임에도 톰 행크스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제임스 딘보다 더 어린 성난 반항아들의 총격 액션이 라이브로 펼쳐진다고 말해주자. 무역센터 무너지는 모습과 같은 세계 각지의 전쟁 스펙터클도 보너스로 주어진다고 귀띔할 것. 지난 몇달 동안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열린 촛불시위와 반전데모에 참여한 군중이 모두 예상 관객이라고 덧붙여주면 금상첨화겠다.
2. 120분짜리 다큐멘터리라니 지겨워 죽을 일 있느냐고 투덜대는 사람들이 있다면? 필름을 좀 잘라버리자. 사람 목숨도 애들 손으로 들어내는 처지에 필름 좀 들어냈기로서니 대수냐고 말하는 거다.
3. 이상의 작전이 여의치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자. 새 정부의 외교와 문화노선에 대한 막강한 원군을 미국 안에서 발견했다고 알려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