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6]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3-03-21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릴리 슈슈의 모든 것>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14살 봄, 우리들은 썩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어난 것은 1980년 12월8일 22시50분 이 날짜는 존 레넌이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살해당한 일시와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우연의 일치는 의미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날, 그 시각에 그녀가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이름, 릴리 슈슈….”

분노의 계절을 잊었던가. 푸른 꿈보다는 살의(殺意)가 더욱 치밀어올랐던 그 시간들을. ‘데미안’마저 부재했던 그 완벽한 고립의 시간들을. 이와이 순지의 최근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14살의 봄, 유충의 시대를 끝내고 음울한 누에고치에 갇힌 번데기의 계절로 접어든 ‘소년, 소녀들의 모든 것’이며, 의 영상적 화사함과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주제적 어두움을 한 작품 속에서 완벽하게 조율하게 된 감독 ‘이와의 순지의 모든 것’이다.

눈이 시린 초록빛 논 한가운데 소년이 서 있다. 대기 속을 부유하는 ‘릴리 슈슈’의 음악에 빠진 소년에게는 오로지 그녀의 음악만이 탁한 세상 속에서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관이다. 이런 아이들이 밤이 되면 릴리 슈슈의 팬사이트인 ‘릴리 필리아’의 대화창에서 만난다.

“리리의 에테르에는 특수한 힘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줘.”

“우리가 하찮을 존재일지라도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힘….”

“내 등을 갈기 찢고 하늘로 춤추며 올라간다!”

“난 하늘을 날고 있다, 날고 있다! 날고 있다!”

학교에서, 식탁에서 묵묵히 침묵만을 유지하던 그들은 빠른 키보드 소리 속에 웅변하고, 모니터를 향해 절규한다. 그러나 그들은 ‘파란 고양이’, ‘필리어’ 등의 닉네임 뒤에 앉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배에 칼을 꽂기 전까진.

펄럭거리는 흰 커튼과 왁자지껄한 교실, 사선으로 빛이 스며들어오는 복도,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러브레터> 까지 교실은 이와이 순지의 변함없는 무대였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드뷔시의 <월광>과 <아라베스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넘나드는 교실은 여전히 따뜻한 빛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추억을 끝내고 기억한다. 벨 듯이 날카로운 기억으로, 그 지옥 같았던 유년을 잔인하게 기술한다.

열네살 소년 유이치는 반항하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며 돈을 뜯어내는 친구들에게도, 동정없는 세상에도, 그는 그저 조용한 먹잇감일 뿐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한때 유이치의 친구였던 호시노다. 그는 교실의 생태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 ‘오색 왕나비의 날개’를 스스로 찢어버리고 ‘송곳니’를 얻는다. 호시노 패거리에 덜미를 잡힌 소녀 츠다는 “모든 남자들이 고객으로 보일 정도”로 원조교제를 해야 한다.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 쿠노 요코(<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엔타운>에서 아게하로 나왔던 바로 그 소녀!)는 이지메에 이어 집단강간을 당한다. ‘우화(羽化)할 시기가 지나도’ 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누에고치 속에서 아이들은 썩기 시작한다. ‘조숙한 자부터 차례차례, 내부에서부터 조금씩조금씩.’ 부패의 속도는 릴리 슈슈의 ‘에테르’(정기)가 막아내기엔 너무나도 강하고 빠르다. 그리고 아이들은 릴리 슈슈의 콘서트장 앞에서 친구의 칼에 의해 무릎을 꺾이며, 송신탑 아래서 제비연처럼 비상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2000년 12월8일,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15살의 봄은 잔인하게도 찾아왔다.

이미 십여년 전 그 분노의 계절을 이겨냈던(그러나 과연 이겨냈었던가!) 나는 2001년 부산의 한 극장에서 ‘릴리 슈슈’와 조우했다. 그리고 그녀의 에테르에 휩싸인 채 유이치를, 호시노를, 츠다를, 쿠노를 만났다. 핑크빛으로 포장해 던져두었던 내 ‘살의의 시간들’이 떠올라, 허망하게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름 논을 볼 때면 가끔 멍해진다. 미칠 듯한 초록색의 물결이 뇌수 속을 유영한다. 악취미라고 욕할지라도, ‘이와이 월드’로부터 날아든 이 슬프고 아름다운 초대장을 이제는 함께 펼쳐보고 싶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