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5] -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2003-03-2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赤い橋の下のぬるい水)

오늘, 그는 다시 일어선다

한숨을 돌리려 멍하니 하늘을 보다 어떤 영화가 떠올라 혼자 키득거려본 적이 있으신지? 침울하고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질 때 어떤 영화에 대해 떠들다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껴본 적 있으신지? 아마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가 <오스틴 파워>인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인지는 달라도. 내겐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그렇다. 2년 전에 본, 흐릿한 기억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언제나 미소짓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차마 거울을 보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혹시 음흉한 미소일까 겁이 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지워지지 않는 잔상은 섹스를 하면서 물을 뿜어내는 신비한 여인이다. <우나기>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출옥한 뒤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야쿠쇼 고지에게 따뜻한 도시락을 전해주려 다리 위에서 기다리던 여자 시미즈 미사가 그 역을 한다. <우나기>에서처럼 그녀는 야쿠쇼 고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랑의 방식이 오묘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여자의 몸은 정기적으로 물을 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구멍까지 물이 차올라 참을 수 없을 때 그녀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면서 치마 아래로 물을 흘린다. 뭔가 나쁜 짓을 하면 몸에 고인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다. 자, 이제 그녀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의 몸에 올라탄다. 다리를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쾌락에 몸을 맡긴다. 분수처럼 천장까지 솟구치는 물, 남녀는 샤워를 하듯 흠뻑 젖는다. 이건 분명 포르노적 상상력이다. 노출 정도로 따지면 여체의 굴곡조차 나오지 않지만 분출하는 물과 희열에 들뜬 신음소리만으로도 손바닥에 땀이 난다.

이 영화에서 야쿠쇼 고지는 실직한 가장으로 나온다. 축 처진 어깨, 침울한 표정,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돈이 없다. 직장은 언제 구하냐” 하는 아내의 불평뿐이다. 그가 신비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 건, 어울려 지내던 어떤 노인이 붉은 다리 옆의 2층집에 보물을 숨겨뒀으니 찾아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노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하릴없는 야쿠쇼 고지는 노인이 말한 곳에 도착하고 거기서 여인을 만난다. 영화는 충격적인 물세례를 경험한 뒤 달라지는 남자의 삶을 보여준다. 늘 양복을 입고 출근하던 남자는 이곳에 머물면서 졸지에 뱃사람이 된다. 그의 손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는 다시 요동치는 삶의 에너지다. 어느 날 배를 타고 나갔다 돌아오던 남자는 2층집의 여인이 신호를 보내는 것을 본다. 물이 차올라 못 참겠다는 신호다. 남자는 뛰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그는 옆에 뛰고 있던 마라토너보다 빨리 달린다. 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 들 때 그걸 능가할 에너지는 없다.

짐작하겠지만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판타지다. 현실이라면 처자식 딸린 사내가 대책없이 외도하는 이야기로 도덕적 질타를 받을 만하지만, 사회로부터 폐기처분된 남자가 경험하는 이 아찔한 성적 환상엔 갑갑한 현실에서 탈주하는 일탈의 쾌감이 있다. 그건 마치 주성치의 <소림축구>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소림축구>에서 소림사 무술과 접목된 축구를 통해 실현했던 사회적 낙오자들의 연대와 승리가 그렇듯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섹스는 엄청나게 과장된 표현을 통해 사회적으로 불능판정을 받은 한 남자에게 희망을 제공한다. 여인의 부름에 뛰어갈 수 있는 다리(?)가 있기에 남자는 다시 일어선다.

솔직히 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처럼 성욕과 정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영화를 처음 봤고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 놀라운 섹스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여인의 물은 고개숙인 남성만이 아니라 만물을 소생시킨다. 한때 카드뮴으로 오염됐던 강이 치유되고 물고기가 뛰놀며 갈매기가 춤을 춘다. 영화를 만들 당시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는 75살. 그는 타오르는 젊은 남녀의 욕망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삶과 대비해 보여준다. 수십년간 같은 자리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던 여인, 그녀를 찾아갈 용기가 없던 남자, 다른 남자를 기다리니 어쩔 수 없다며 일찍 체념했던 사내들, 그들의 후회와 미련이 이 영화가 선동하는 쾌락주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처음엔 대단한 노인이야, 저 나이에 저런 상상을 하네, 했지만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노대가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후세에게 전하는 이마무라의 이 유머러스한 충고를 듣는다면, 당신도 입가에 저절로 생기는 야릇한 미소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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