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3] - 해피니스
2003-03-21
글 : 서동진 (영화평론가)

<해피니스>(Happiness)

신경쇠약직전의 미국으로 오세요

토드 솔론즈의 <해피니스>의 국내 배급사가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한 내 상상력은 이처럼 배짱이 없다. <해피니스>에는 소아성욕자인 정신분석가, 사정을 못해 안달난 열한살 먹은 남자아이, 폰섹스에 열중하는 비루한 사내가 화면을 들락거린다. 그들의 삶은 어딘가 덧나 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다. 고로 이 악몽 같은 영화를 사랑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단 보고 난 뒤라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 뒤숭숭한 영화를 잠시 기억에 가둬놓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기억의 휴지통에서 비워줄 ‘삭제’ 키는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가 그렇다. 이 퍽퍽하고 짜증난 영화를 당분간 잊었다 싶은데, 이 영화는 수시로 악의적인 미소를 띠며 귀환한다.

<해피니스>가 돌아오는 기억의 궤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외상의 흔적을 타고 흘러다니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삶을 일순 혼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순간에 불쑥 나타난다. 천박한 말이지만 <해피니스>의 몇 장면은 당신의 제일 좆 같은 순간에 예약된 전보처럼 도착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떼어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사랑하는 게 낫지 않은가. 내가 <해피니스>와 불편한 인연을 해결한 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각설하고. <해피니스>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는데 개봉 타임에 대한 조언 한마디. 마침 시즌이 좋다. <해피니스>는 이 참에 개봉해야 옳다. 반미 촛불시위와 반전평화시위에 슬슬 지쳐가고 있을 때, 우리에겐 미국 자본주의를 즐겁게 분석하는 휴식시간이 필요하다. <해피니스>는 거룩한 척 잘난 척하는 미국을 의자에 뉘고 즐기는 정신분석 타임이다. 토드 솔론즈는 섹스와 연애와 고독과 가족이라는, 영화의 역사가 언제나 사랑했고 숭배했던 소재들을 다룬다. 그렇지만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모두 발가벗기고 죄다 망가뜨린 채 영화로 운반한다. 물론 그 분야엔 선수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그들에겐 적어도 간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한 비장한 연민이 있다. 그래서 토드 솔론즈처럼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신경을 긁기는커녕 애틋한 페이소스마저 자아낸다.

<해피니스>는 그런 자비를 반푼어치도 베풀지 않는다. 그것의 악취미는 미국 자본주의의 매스미디어가 가진 인간에 대한 취미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라면 <해피니스>의 주인공들을 병리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로 가처분할 것이며 시사뉴스와 심층 다큐멘터리의 구경거리로 거세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들의 개인의 비극적 파멸과 사회적 증후로 각색하려 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은 소박한 미국적 삶으로 둔갑할 것이다. 그러나 토드 솔론즈의 악취미적 리얼리즘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의 영화는 갈수록 그로테스크해지고 또한 우습고 슬프고 지겹고 헛헛한 이야기를 뽑아낸다. 나는 토드 솔론즈의 이 뻑뻑함을 사랑한다. 내 확신처럼 삶은 그처럼 복잡하고 지겹고 더러우며 애매하다. 이 삐딱한 확신에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놓치지 마라. 당신의 친구가 또 한놈 있다.

<해피니스>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기말 미국 자본주의의 생활사 박물관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해서 천국 가라’는 자본주의적 지상명령을 ‘행복해라’라는 지상명령으로 바꿔내는 데 성공한, 21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음화이다. 조지 부시 2세가 지켜주겠다고 오버하는 보통 사람들의 미국, 안온한 가족적 삶과 달콤한 바닐라 섹스의 미국은, 사실 몰골이 이렇다. <해피니스>의 화면 내부로 시종일관 강박관념처럼 들려오는 거북하고 짜증스런 실내악의 선율만큼 조지 부시의 미국 이데올로기를 잘 요약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사운드가 단순히 세계의 아이러니를 가리키는 팁이라면 별난 건 없다. 그 사운드는 표면적으로 쾌적하고 건전한 삶의 이면에 놓인 부조화하고 역기능적인 삶의 갈등과 모순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자본주의의 목소리가 갖는 공허함이고, 신경쇠약직전 상태의 미국의 유령이다. 그것은 그저 세상의 삶과 영원히 만나지 못한 채 영원히 울려퍼질듯이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우리는 그 소리가 곧 우리가 내내 들어온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복음임을 잘 알고 있다. 나치즘의 정신분석이 필요했듯이 우리에겐 미국적 파시즘의 정신분석이 필요하다. 그것은 부시를 분석하는 게 아니다. 지도자의 분석은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저 유명한 ‘미국적 생활양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해피니스>는 그 분석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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