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잠자는 걸작 10편, 깨워라! [2] - 큐어
2003-03-21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큐어>(Cure)

내 안에 악마가 숨어 있어

나카다 히데오의 <링>과 이토 준지 원작의 공포영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 공포영화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중이다. 고전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은 1964년 작품이고, 고어영화인 이케다 도시하루의 <이블 데드 트랩>은 너무 잔혹해서 수입할 수 없다면 마지못해 수긍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1997년 작 <큐어>는 왜? 이미 수입까지 된 상황에서 <큐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83년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누벨바그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장르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바쳐온 감독이다. <인간합격> <카리스마>처럼 장르에서 벗어난 걸작들과 함께 <지옥의 경비원>에서 시작하여 <큐어>를 거쳐 <카이로>에 이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은 일본 공포영화의 튼튼한 기둥이라고 불러도 좋을 위대한 걸작들이다. 모든 거품이 터져버리고, 안전신화가 무참하게 박살난 세기말 일본사회의 일상에 뿌리박힌 ‘암’을 후벼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메스는 <큐어>에서 섬뜩하게 빛을 발한다.

도쿄지역에서 끔찍한 살인이 잇따라 일어진다. 희생자의 목을 X자로 베어버린 가해자들은 교사, 의사, 경찰 같은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은 살인을 한 상황을 기억하기는 하지만, 왜 자신이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다가베 형사는 가해자들 사이의 연관을 찾다가, 그들 모두 의과대학생인 마미야를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분열증 환자이며 최면술에 심취했던 마미야는 이곳저곳 방랑하다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살인을 명령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묘하다. 마미야는 그냥 물어본다. 너는 누구야, 왜 여기에 있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같은 평범한 질문이다. ‘넌 누구야, 네 이야기를 해줘, 그가 밉지’라는 말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마음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헤집어놓는다.

마미야는 해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만난다. 교사는 마미야를 집으로 초대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이며 너무나도 금실이 좋았던 교사의 부인은 마미야를 환대한다. 그리고 다음날, 교사는 부인을… 죽인다. 행복이 넘쳐나는 듯한 해변의 집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지는 광경은, <큐어>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어둠과 불빛이 교차되면서 쭈그리고 앉은 마미야의 모습이 아련하게 드러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잡아내고, 그 나지막한 소리와 안개 같은 화면만으로 공포감을 자극한다. 구로사와 특유의 ‘원신 원컷’의 긴장감이 한껏 느껴진다. 화면 틈으로 스며드는 듯한 효과음향과 음악도 아득한 현기증으로 밀려든다. <큐어>에서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우리의 그것이다. 경찰은 3년 전부터 기분이 나빴던 동료를 죽인다. 여의사는 여자라고 업신여기는 남자를 죽인다. 보이지 않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사소한 적개심이, 마미야의 최면으로 순식간에 현실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고지라가 등장하여 평화로운 도쿄를 박살내듯, <큐어>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악마가 출현하여 일본이라는 폐쇄집단의 신화를 깨버리는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악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지옥의 경비원>에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경비원이 악마가 되어버리듯, 구로사와는 일상의 날카로운 이빨이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을 잡아낸다. 장르영화의 형식을 정밀하게 무너뜨리고 새롭게 구축해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영화는 <큐어>에서 완성되었고 <카이로>에서 정점에 달한다. 구로사와 영화에서 사람들은 늘 사회의 시스템에서 분리되어 어디론가 간다. “나의 관심은 늘 시스템과 개인에 대한 것이다. 개인이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죽는 것, 범죄자가 되는 것 그리고 미치는 것. <큐어>에서는 범죄자가 되고 <카리스마>에서는 미치고 <인간합격>에서는 죽는다.” 그러나 <카이로>에서는 살아남는다. 더이상, 시스템에서 나가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큐어>에 이은 <카이로>에서 보여준다.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큐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좁은 문이다. 그 문을 걸어들어가면, 일본영화의 변두리에서 일본사회의 핵심을 파고드는 구로사와의 영혼을 정면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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