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9] - 아주 특별한 신인감독 ②
2003-10-17
글 : 이영진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폐허 위에 끔찍하고 비극적인 기억을 읽었다”

탈레반 정권 후 첫 번째 장편 <오사마>의 세디그 바르막 감독

세디그 바르막(41) 감독은 영화제 게스트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끌었다. 탈레반 정권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첫 번째 장편영화이며,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제작을 맡아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하지만 폐허로 변해버린 아프가니스탄의 풍광 위에 생계를 위해 소년으로 변장했다가 비극의 낭떠러지로 발을 내디디게 되는 소녀의 운명을 겹쳐놓은 <오사마>(2002)의 절절한 울림을 대하고 나면 그에게 쏟아진 환대는 온당하고 마땅하다.

-관객 반응이 좋았다.

=진심으로 영화를 받아들인 것 같다. 어쩌면 한국도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한 고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산가족이 만나는 장면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본 적이 있는데 공감했다. 전쟁을 벌인 자들은 결코 그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

데뷔작 <오사마>를 만들기까지 바르막은 수많은 협곡을 힘겹게 지나야 했다. “할리우드 범죄물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극장 나들이를 밥 먹듯이 했다는 그는, 1982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날때까지만 해도 ‘감독의 길’을 의심치 않았다. 1980년 소련의 침공에 대해서도 그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예비감독의 꿈은 가혹한 현실에 의해 20년 가까이 유예됐다.

-유학 시절 비애감은 들지 않았나.

=간디를 보라. 그는 영국에서 공부했다. 호치민을 보라. 그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로 떠나지 않았나? 소련에서 공부할 때도 현실을 잊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온 건 1987년인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열악했다. 간섭도 심했고. 그래서 소련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던 무자헤딘 조직에 몸담게 됐고, 전장에서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싸웠다.

1996년 영화제작을 일절 금지한 탈레반 정권을 피해 바르막은 파키스탄으로 망명한다(그는 무려 5개국 언어를 구사한다. 질곡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흔적이다). “위대한 영화감독 이전에 위대한 인간”인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연을 맺은 것도 이곳에서다. <칸다하르> 촬영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찾았던 모흐센을 동료 감독의 소개로 만난 것이다.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오후 5시>의 로케이션이 가능한지 알아보려고 아프가니스탄을 찾은 모흐센과 재회하게 됐고, 어렵게 오랫동안 구상해온 이야기를 꺼냈다. 모흐센은 그 자리에서 기꺼이 후원자가 되기로 약속했다.

-마리나는 슬픔과 두려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눈빛을 지닌 것 같다.

=고아원과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난 아이들만 3천명쯤 된다. 애초 남자아이를 쓸 작정이었는데 어느 날 밤 누가 “아저씨, 저 돈 좀 주세요” 구걸하는 거다. 마리나였는데 눈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TV도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중략…) 우리는 모두 비극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다. 마리나 또한 폭격 때문에 죽은 자신의 언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가혹하지만 극적 상황에 그대로 노출시킨 다음 마리나의 실제 반응을 담으려 했다. 촬영 도중 오사마에게 족쇄가 채워지는 장면에서 마리나는 정말로 겁에 질려 울었다.

<오사마>는 어둡고 음울하다. 바르막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하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촬영현장에서 바르막을 가장 괴롭힌 것도 끔찍한 현실이 끊임없이 환기되는 순간이었다. 포탄이 날아들기 일보 직전인 병원에서 홀로 남은 아이(실제 이 아이는 고아다)가 뒤뚱거리며 힘겹게 걷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으면서 그는 뷰파인더를 보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떠올라서.

-열악한 환경이라 촬영이 힘들었을 텐데.

=카메라도 이란에서 수리해 와 썼다. 또 전기가 없어 항상 소음 큰 발전기를 끌고 다녀야 했다. 잦은 고장을 일으키는 고물차와 씨름하면서 찍었다. 소란을 피우거나 여자 연기자들에게 치근덕대며 방해를 일삼는 탈레반 옹호자들도 골칫거리였다.

아프간영화협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오사마>의 스탭으로 참여했던 이들의 단편을 제작하기도 했다. 다음 작품으로 “코미디를 만들어 웃음을 잃어버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웃음을 돌려주고 싶다”는 그는 헤비급 권투선수 같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도중 몇몇 질문에 여러 번 눈물을 보였다.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만들었다”

영화신동 <마트루부미: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땅>의 마니쉬 자

아주 흔치는 않지만 영화세상에도 가끔은 신동이 등장한다. 첫 단편영화 <매우매우 조용한 영화>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첫 장편영화 <마트루부미: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땅>으로는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국제평론가협회상을 받은 마니쉬 자도 그런 부류라 할 수 있다. 튀는 옷차림과 거침없는 발언 등 78년생 젊은이다운 혈기를 과시해 영화제의 스타 중 하나로 대접받았던 그는 자신의 장편 데뷔작에도 강력한 에너지를 담아내 영화제 초반 많은 관객의 박수를 얻었다.

<마트루부미…>는 인도 일부 지방에서 아직도 횡행하는 여아살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영화다. 유네스코의 통계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매년 5천만명의 여성 인구가 감소하는데, 이는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고 한다. 여아살해가 그만큼 심각한 문제라는 것.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만드는 나라인 인도에서 아직까지 그 어떤 영화도 여아살해를 다룬 적이 없었”기에 이 혈기방장한 청년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으로 이 뿌리깊은 사회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마트루부미…>가 특이한 점은 중반부까지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오히려 코믹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는 사실. 여자가 한명도 없는 마을에서 여자를 찾기 위해 벌이는 해프닝과 마침내 마을로 들어온 소녀를 둘러싼 다툼은 시종 웃음을 자아낸다.

-<마트루부미…>는 중반부까지 상당히 코믹하다.

=이 영화는 아주 추악한 현실과 심각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만약 곧이곧대로 표현한다면 관객은 지루해 했을 것이다. 이 ‘하드코어 리얼리티’를 관객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에서 무게를 덜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풍자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찰리 채플린도 ‘하드코어 리얼리티’를 보여주면서도 웃음을 주지 않냐. 그래서 그의 영화를 위대한 코미디라 부르는 것이 아니겠나. 하지만, 중반을 지나면서 영화는 표정을 완전히 바꾼다. 마을에서 유일한 소녀의 고통을 카메라는 잔인하게 응시한다. 아버지와 다섯명의 아들들이 번갈아가며 여자를 차지하고, 여자가 소와 함께 우리 안에서 살게 된 뒤에는 마을 사람들까지 가세한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표현은 갈수록 강도가 높아진다.

-표현이 굉장히 도발적이다.

=언론에 의하면, 인도에는 실제로 여자가 없는 마을이 여럿 존재한다. 또 정부에서 여아살해를 금지하니까 여자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가슴에 차가운 수건을 놓아 폐렴에 걸려 자연스레 죽게 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영화 시작 부분에 ‘이 영화는 사실에 기반한 게 아니다’라는 자막을 넣었지만, 그건 특정 마을의 특정 사람들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 영화에 나오는 내용이 진실이 아니란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자연 거칠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델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마니쉬 자는 졸업 뒤 뭄바이로 이주해 TV시리즈의 조연출이 됐다. 어릴 때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인도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화계의 어디선가 일하겠다는 생각을 품곤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드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도 마니쉬 자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비교적 재능있는 연출자 아래서 일할 수 있었기에 그는 연출의 기초적인 과정을 익힐 수 있었고, 얼마 뒤 자신만의 힘으로 첫 단편영화 <매우매우 조용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칸에서 이 작품을 본 프랑스의 파트릭 소벨만이 적극적으로 나서 <마트루부미…>를 만들 수 있었다.

사회의 정의와 균형을 갈망하는 그는 “시스템과 싸우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영화는 관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뭔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마트루부미…>에서처럼 말이다.

-(당신의 성향으로 미뤄볼 때) 발리우드 뮤지컬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뭐라고! 나는 발리우드 뮤지컬을 보며 자라났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너무 좋다. (웃음) 영화란 것은 본디 즐거움을 주는 것 아니냐. 물론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대한다는 것도 아니다. 발리우드영화의 진짜 문제는 현실을 미화하고 왜곡한다는 사실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